법정스님의 의자

물질적인 풍요와 결과만을 쫓는 각박한 세상에서 수많은 이들에게 삶의 참된 의미와 여정의 중요성을 깨우쳐준 故법정스님. “선택한 가난은 가난이 아니다.”라는 청빈의 도를 실천하며, ‘무소유’의 진정한 가치를 널리 알려 온 故법정스님의 일대기와 가르침을 담은 "법정스님의 의자"는 성공과 실패만을 논하는 혼탁한 이 시대에 가련한 영혼을 일으켜 세우며 삶의 진실된 행복과 참된 가치를 일깨워 준 휴먼 다큐멘터리이다.

“법정스님의 의자”에 등장하는 의자는 법정스님의 ‘무소유’ 정신이 깃든 특별한 물건, 일명 ‘빠삐용 의자’로 불리우는 이 의자는 불일암에 거주하던 시절 교외에 나올 일이 있을 때 종종 극장을 찾아 조조영화를 봤을 만큼 영화를 즐겼던 법정스님이 당시 영화 ‘빠삐용’을 보고 영감을 얻어 만든 것. 참나무 장작개비로 손수 만든 이 의자는, 자연에서 얻은 소중한 산물이기도 하다. 이 의자가 지닌 상징성은 소설 ‘무소유’에서도 그 구절이 인용되어 있다. “의자 이름은 지어둔 게 있어. 빠삐용 의자야, 빠삐용이 절해고도에 갇힌 건 인생을 낭비한 죄였거든. 이 의자에 앉아 나도 인생을 낭비하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보는 거야.”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나는 지금 진정한 나로 살고 있는지.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보고, 참된 행복의 의미를 생각해보는 휴식과 치유의 의자라고 한다.

“살다가 다 가는 것이지, 영원히 사는 사람이 없잖아…” 하시며 2010년 3월 11일 79세의 나이로 입적하신 후 세상에 공개된 법정스님의 유언장은 많은 이들에게 충격과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마지막 떠나는 길에도 진정한 ‘무소유’의 삶을 실천했기 때문. 사십 년 전 그가 남긴 글 ‘미리 쓰는 유서’에는 ‘장례를 간소히 해라. 번잡하게 하지 말고 가사 한 장만 덮어서 보내달라.’는 ‘무소유’ 사상이 그대로 담겨있다. 이 유서의 내용은 79세의 나이로 입적할 때 한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지켜졌다. ‘고승열전’의 저자인 윤청광 작가는 “30대에 쓴 유언 그대로 일흔아홉에 돌아가셨는데 그걸 그대로 하신 분이 과연 세계에 몇 분이나 계실까?”라며 그의 행적에 깊은 존경을 표했다. 특유의 거친 목소리로 시작되는 법정스님의 유언은 다비식의 모습과 함께 법정스님의 육성이 그대로 전해지는 가슴 뭉클함이 남는 다큐였다.

법정스님이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 기억하는 때는 바로 스승인 효봉과 함께 보낸 한 철이라고 한다. 한번 참선에 들면 엉덩이가 짓무르도록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서 절구통 수자로 불린 효봉스님. 법정이 입산한 이듬해 효봉스님은 막 계를 받은 어린 사미승, 법정만을 대동한 채 모든 지도자의 자리를 거두고 지리산 쌍계사로 마지막 안거에 들어갔다. 그리고 법정스님은 바로 이 시절을 가장 행복하고 가슴 벅찬 시절로 기억했다. “중이 하나만 있으면 되지 왜 두 개가 필요한가”하며 법정으로 하여금 청빈의 도를 일깨워주며 ‘무소유’의 단초를 마련해 준 효봉스님.“네가 장사해서 번 돈도 아니고 신도들이 갖다 준 것인데, 도를 닦아서 부처되라고 신도들이 먹고 싶은 거 덜 먹고 입고 싶은 거 안 입고 갖다 준 것을 함부로 해서 되겠느냐”며 공양에 대한 감사를 일깨워준 계기를 마련해준 사람이기도 하다. 역시 큰 스승의 큰 가르침을 받은 듯 하다. 또한 그의 재능을 인정하고 귀하게 여긴승들 중 법정스님의 필력을 알아본 것은 운허스님이었다. 당시 평양의 인텔리로 독립운동을 하다가 출가한 운허스님은 법정스님의 필력을 가장 먼저 알아본 것. 우리나라 최초로 불경 번역사업을 시작한 동국역경원을 세우기도 한 운허스님은 법정스님에게 역경사업을 맡겼고 이후 수많은 불경들이 법정스님의 손을 거쳐 세상에 나왔다. 해인사 시절, 장경각을 구경하고 나오던 한 보살이 법정스님곁을 지나며 혼잣말로 ‘팔만대장경이 있다더니 웬 빨래판만 가득하더라’는 말을 들은 법정스님의 충격은 더욱 불교의 언어를 세상의 언어로 바꾸는 일에 매진하게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운허스님이 우리나라 최초의 불교사전 번역 작업을 하는 일에 법정스님이 참여하게 됐고, 법정스님은 어려운 불교 용어를 사전 없이도 글을 읽을 줄 아는 이라면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글로 전하여 절에 갇혀 있던 불교 사상을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지도록 불교의 대중화에 기여했다.

자연을 벗삼아 청빈의 도를 따라 무소유의 삶을 살았던 법정스님에게 마지막까지 가장 버리기 힘들었던 것은 아름다움을 추구하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법정스님에게 아름다움이란 가장 단순하고 절제된 삶, 즉 자연과 조화를 이룬 삶이었다. 그의 자연사랑은 대숲의 풍경이나 하늘을 바라볼 때, 맑은 바람 소리만 들어도 마음이 맑고 차분해지는 것으로 소유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를 사랑하는 사상 그 자체였다. 법정스님이 처음 불일암을 찾았을 때 텅 빈 절터에 홀로 피어 그를 맞아주던 벗꽃들의 순수한 아름다움은 그의 삶을 기쁨으로 채워주었던 소중한 것이었다. 법정스님과 마음을 나누고자, 삶에 힘이 되는 좋은 말 한 마디를 듣기 위해 깊은 산 속 암자를 찾아온 사람들에게 참나무 장작으로 직접 만든 의자에 앉히고는 “이 산 속까지 와서 무엇을 더 채우려는가. 자연을 마음껏 누리고 비워내고 가라.”는 말만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는 일화는 모든 이들의 마음 속에 자리하고 있는 ‘무소유’ 정신을 일깨워준 참된 행복의 순간이었다. 요즘 사람들이 자연과 격리되어 살며 점점 메마르고 각박해져 잃어버린 스스로를 자연 속에서 되찾고 가라는 의미에서였다. 세상 모든 만물을 사랑한 법정스님 자연 속 삶의 기쁨과 충만함으로 세상을 향기로 물들였던 법정스님!

출처 : daum 영화 줄거리


뱃속에는 밥이 적어야 하고

입안에는 말이 적어야 하며

마음속에는 일이 적어야 한다.


미리쓰는 유서 - 법정 스님

죽게 되면 말없이 죽을 것이지, 무슨 구구한 이유가 따를 것인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지레 죽는 사람이라면
의견서(유서)라도 첨부되어야겠지만
제 명대로 살 만치 살다가 가는 사람에겐
그 변명이 소용될 것 같지 않다.

그리고 말이란 늘 오해를 동반하게 마련이므로,
유서에도 오해를 불러 일으킬 소지가 있다.
그런데 죽음은 어느 때 나를 찾아올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 많은 교통사고와 가스 중독과 그리고 원한의 눈길이
전생의 갚음으로 나를 쏠는지 알 수 없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죽음 쪽에서 보면
한 걸음 한 걸음 죽어 오고 있다는 것임을 상기할 때
사는 일은 곧 죽는 일이며 생과 사는 결코 절연된 것이 아니다.

죽음이 언제 어디서 나를 부를지라도
"네" 하고 선뜻 털고 일어설 준비만은 되어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유서는 남기는 글이기보다
지금 살고 있는 '생의 백서(白書)'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육신으로서는 일회적일 수밖에 없는 죽음을 당해서도
실제로는 유서 같은 걸 남길 만한 처지가 못 되기 때문에
편집자의 청탁에 산책하는 기분으로 따라 나선 것이다.

누구를 부를까...?
유서에는 흔히 누구를 부르던데?
아무도 없다.
철저하게 혼자였으니까.

설사 지금껏 귀의해 섬겨온 부처님이라 할지라도 그는 결국 타인이다.
이 세상에 올 때도 혼자서 왔고 갈 때도 나 혼자서 갈 수밖에 없다.
내 그림자만을 이끌고 휘적휘적 삶의 지평을 걸어왔고 또 그렇게 걸어갈 테니
부를 만한 이웃이 있을 리 없다.
물론 오늘까지도 나는 멀고 가까운 이웃들과 서로 왕래를 하며 살고 있다.
또한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생명 자체는 어디까지나 개별적인 것이므로
인간은 저마다 혼자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보랏빛 노을 같은 감상이 아니라 인간의 당당하고 본질적인 실존이다.
고뇌를 뚫고 환희의 세계로 지향한 베토벤의 음성을 빌리지 않더라도,
나는 인간의 '선의지(善意志)'
이것 밖에는 인간의 우월성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온갖 모순과 갈등과 증오와 살육으로 뒤범벅이 된 이 어두운 인간의 촌락에
오늘도 해가 떠오른 것은 오로지 그 선의지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세상을 하직하기 전에 내가 할 일은
먼저 인간의 선의지를 저버린 일에 대한 참회다.
이웃의 선의지에 대해서 내가 어리석은 탓으로
저지른 허물을 참회하지 않고는 눈을 감을 수 없는 것이다.

때로는 큰 허물보다 작은 허물이 우리를 괴롭힐 때가 있다.
허물이란 너무 크면 그 무게에 짓눌려 '참괴(慙愧)'의 눈이 멀고
작을 때에만 기억이 남는 것인가?
어쩌면 그것은 지독한 위선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평생을 두고
그 한 가지 일로 해서 돌이킬 수 없는 후회와 자책을 느끼고 있다.
그것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문득문득 나를 부끄럽고 괴롭게 채찍질했다.

중학교 1학년 때,
같은 반 동무들과 어울려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서였다.
엿장수가 엿판을 내려 놓고 땀을 들이고 있었다.
그 엿장수는 교문 밖에서도 가끔 볼 수 있으리만큼 낯익은 사람인데
그는 팔 하나가 없고 말을 더듬는 불구자였다.
대여섯된 우리는 그 엿장수를 둘러싸고 엿가락을 고르는 체하면서
적지 않은 엿을 슬쩍슬쩍 빼돌렸다.
돈은 서너 가락치밖에 내지 않았다.
불구인 그는 그런 영문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 일이, 돌이킬 수 없는 이 일이,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가 만약 넉살 좋고 건장한 엿장수였더라면
나는 벌써 그런 일을 잊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장애자라는 점에서 지워지지 않은 채 자책은 더욱 생생하다.
내가 이 세상에 살면서 지은 허물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 중에는 용서받기 어려운 허물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까닭인지
그때 저지른 그 허물이 줄곧 그림자처럼 나를 쫓고 있다.
이 다음 세상에서는 다시는 더 이런 후회스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빌며 참회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살아 생전에 받았던 배신이나 모함도
그때 한 인간의 순박한 선의지를 저버린 과보라 생각하면 능히 견딜 만한 것이다.
"날카로운 면도날은 밟고 가기 어렵나니
현자가 이르기를 구원을 얻는 길 또한 이같이 어려우니라"
[우파니샤드]의 이 말씀을 충분히 이해할 것 같다.
내가 죽을 때는 가진 것이 없으므로
무엇을 누구에게 전한다는 번거로운 일도 없을 것이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은 우리들 사문의 소유 관념이다.
그래도 혹시 평생에 즐겨 읽던 책이 내 머리맡에 몇 권 남는다면,
아침 저녁으로 "신문이오" 하고 나를 찾아주는 그 꼬마에게 주고 싶다.

장례식이나 제사 같은 것은 아예 소용없는 일,
요즘은 중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한 술 더 떠 거창한 장례를 치르고 있는데
그토록 번거롭고 부질없는 검은 의식이 만약 내 이름으로 행해진다면
나를 위로하기는커녕 몹시 화나게 할 것이다.
평소의 식탁처럼 나는 간단 명료한 것을 따르고자 한다.
내게 무덤이라도 있게 된다면 그 차가운 빗돌 대신,
어느 여름날 아침에 좋아하게 된 양귀비꽃이나 모란을 심어 달라고 하겠지만
무덤도 없을 테니 그런 수고는 끼치지 않을 것이다.
생명의 기능이 나가버린 육신은 보기 흉하고 이웃에게 짐이 될 것이므로
조금도 지체할 것 없이 없애주었으면 고맙겠다.
그것은 내가 벗어버린 헌옷이니까...

물론 옮기기 편리하고 이웃에게 방해되지 않을 곳이라면
아무데서나 '다비(茶毘, 화장)'해도 무방하다.
사리 같은 걸 남겨 이웃을 귀찮게 하는 일을 나는 절대로 하고 싶지 않다.
육신을 버린 후에는 훨훨 날아서 가고 싶은 곳이 있다.
'어린 왕자'가 사는 별나라 같은 곳이다.
의자의 위치만 옮겨 놓으면
하루에도 해지는 광경을 몇 번이고 볼 수 있다는 아주 조그만 그런 별나라...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봐야 한다는 것을 안 왕자는
지금쯤 장미와 사이좋게 지내고 있을까?
그런 나라에는 귀찮은 입국사증 같은 것도 필요 없을 것이므로 한번 가보고 싶다.
그리고 내생에도 다시 한반도에 태어나고 싶다.
누가 뭐라 한대도 모국어에 대한 애착 때문에 나는 이 나라를 버릴 수 없다.
다시 출가 수행자가 되어 금생에 못 다한 일들을 하고 싶다.


종교를 떠나 인간다운 한 사람, 본보기가 되어 줄 큰 어른이 떠난 다는 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생명에 있어 태어남이 있으면 죽음도 있는 자연의 당연한 섭리라 하지만

너무 늦은 만남은 아니였는지...

그래도 이 영상의 배움을 통해 마음에 담을 수 있다는 것 감사한 일이다.

앞으로는 내가 실천하는 길 만이 남은 듯 하다.

비기너스(원제: Beginners)

너무나 평범한 영화.
하지만 그 안에 모든게 들어 있는 영화.

아내가 죽자 난 게이였다고 75세에 게이선언, 커밍아웃한 아빠(할-크리스토퍼 플러머)
페암 4기이지만 파티를 즐겨하고 클럽 하우스음악을 좋아하며 연하의 상대와 연애하는 것, 즐기는 것에 대한 두려움 없이 "진짜인생"을 살겠다며 행복해 하는 '할'
4번의 실연을 경험했지만 38살에 찾아 온 남다른 사랑에 대해 불안해 하며 사랑이 잘못 될꺼 같다는 마음에 먼저 떠나려고 하는 사랑을 두려워 하는 아들(올리버-이완 맥그리거)
슬픔을 아픔을 자신에게서 드러내기 보다는 그림안에 풀고 풀어 가려는 특별함이 없는 '올리버'
올리버, 그의 기억에 있어 부모는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형식적인 부부관계로 뜨거운 마음의 엄마는 늘 외롭고 상대적인 아빠의 추억은 별다른 기억 없이 성장한 아들, 그런 부모를 머리와 가슴의 거리를 좁히려 하지만 사랑을 시작할 수 있을지 두려워 했었던 아들.
올리버의 마음을 유일하게 알아주고 항상 그의 곁에서 지키고 있는 150개의 단어를 알아들으며 대화를 나누는 강아지 아더. 아더의 눈빛연기는 연기대상 감 ^^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을 하려는 사람이라면 꼭 봐야할 영화"라는, 딱 한 구절만 듣고 봐야 겠다고 점 찍어 두고 있었는데...
사랑영화라는 이야기를 듣고 나갈까 말까 하다 기분전환으로 다녀 온 저녁 외출!! 잘 다녀온 듯 하다. 올 해는 내게 너무나 짧은 시간에 많은 변화를 받아 들여야 하는 상황들이 낯설기도 하며 언제부터인가 다음에 여유있을 때를 남발하고 있는 부끄러운 내 일상을 그대로 보여 준 듯 싶다.
어쩜 이리도 잔잔히 재미없을 수도 있을 일상을 표현하면서도 많은 걸 보여주고 이야기 해 주었던 영화. "비기너스(원제: Beginners)"

특히 얼마전 아빠의 입원은 우리 가족에게 커다른 놀람으로.. 나에게는 아버지의 삶과 죽음을 생각해봐야 한다고, 늘 곁에 있는 엄마, 아내, 여자라는 역할 보며 내가 살아온 인생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인생에 손을 얹는 계기가 되는 저녁이 됐다.
전라도 엄마의 뜨거운 열정은 역시 아빠의 병환 속 에서 제일가는 공신이였으며, 늘 담담한 모습으로 좋다 싫다 표현치 않는 경상도 아빠의 무뚝뚝한 마음은 나를 힘들게 했다.
그렇다고 우리 아빠가 영화 속 주인공처럼 게이는 아니면서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심많은 엄마에게 사랑표현 즉 애정표현은 왜 그리 아끼시는지 인색하신지.. 미성년 같은 내 머리로 마음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나는 영화 속 아더처럼 우리집 강생이와 한 침대에서 동침을 하며 이성간의 사랑을 챙기기 보다는 아낌없이 받는 사랑에 더욱 익숙해 져버렸다. 내 마음대로 보고픈 대로 하고 픈대로만 하는 30세 미만 미성년의 모습을 다시한번 발견 하는 듯. 사회 속 인간 관계에서 또한 가식적인 것에 적응이 어려워 조금이라도 어색하다 싶으면 먼저 도망가 버리기에 손해 보더라도 마주하지 아니 하며 포기해 버리기도 하는 바보같은 맹꽁이.


사랑에 대한 대상이 사물이 건 사랑이 건 그 어떤 것이 건 뜨거운 열정으로 죽는 순간까지 사랑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고 그것이 인생을 어떻게 바꾸어 놓을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잔잔한 영화!!!
아픔 없이 노력 없이 절대로 그냥 내게 오지 않는 것들, 더 늦기 전에 '진짜 인생'을 두려워 말고 멀리 보고 시작해 보라고 '용기'를 주는 영화.
그 동안 미성년처럼 지내온 내게 잔잔한 호수의 모습 보다는 익숙한 것들과 결별도 해보며 힘찬 파도처럼 힘찬 물살을 일렁이는 물이 되어 봐야 한다고 나 만의 진짜 인생, 진짜 사랑을 만들기 위해서 시작해 보라고 한다.


지난 가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한참을 서서 보았던 묵화,
워낭소리 한 장면도 스치며 맘이 짠했던 작품, 김호석 '소'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요즘의 내 모습을 보는 듯 한 영화가 되었다.
사랑으로 인하여 균형을 유지할 수 없을 때, 내 삶에 끝없는 변화를 요구하는 나를 감당 못할 때, 주변에 누군가에게 나를 설득하지 못하고 있을 때, 헛된 것을 기다리면서 살고 있는 내 모습은 아니였는지...

헌데 이 영화에서 그 모든 답을 주는 듯 하다.
자연의 법칙을 이야기하며 본성의 힘은 중력의 법칙처럼 실재하는 것이며...
때로는 사랑으로 인하여 균형이 깨지는 것도 균형있는 삶을 살아가는 과정이라고.
편안하고 익숙한 모든 것으로 부터 떠날 수 있는 용기가 생겼을 때야 알 수 있다고...
파괴는 선물이며, 파괴가 있어야 변화가 있다고...
끝없는 변화에 대비하는 것, 여자로서 누구의 보호를 받아야 함보다는,
익숙함을 서로 지키며 같이 있는 것보다 더 좋은 인생을 즐길 자격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머무르는 일보다 더 힘이 드는게 떠나는 일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진리를 찾는 것, 나를 찾는 것이 그리도 힘이 드는 일인지도...

진리를 찾아 여행을 떠날 것이라면...
감정의 응어리이건, 외면의, 내면의 것이든, 길 위에서 마주하는 모든 것을 깨달음의 과정으로 여길 줄 알아야 하며, 마주하는 모든 이들에게서 배우고자 하는 마음의 자세를 가질 수 있을 때 그리고 무엇보다 인정하기 힘든 자신의 모습을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을 때에 그 진리는 나에게 모습을 드러 내는 것이라고 한다.

돌체 파 니엔테(DOLCE FAR NIENTE) 달콤한 게으름.
편하게 살려고 발버둥 치는 내모습이 아니라는 것, 보다 힘들게 살지 않으려는 자세
그냥 즐기는 것이 아닌 기쁜 마음으로 즐길 줄 아는 자가 되어 보는 것!!!


나에게 많은 깨달음을 준 영화이다. 즐겁게 보고 행복함 얻는 영화
2% 부족한 아쉬움을 책을 통해 만나보자!! 좋은 글귀, 좋은 생각을 다시 한번 얻기 위해...

2011 피카소와 모던 아트







덕수궁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피카소와 모던 아트 전은 제목과는 달리 피카소의 작품은 아주 적었다.
어짜피 Paris에서 피카소미술관도 다녀 왔던터라 피카소보다는 유럽 모더니즘 대표작가에 욕심이 났다.
많은 작품구성에 많은 인파로 사람에 치여 급 지치기는 했는데 잘 다녀온 듯 싶다. 헌데 도록 이외에는 작품에 딸린 소품을 구매하는데 한계가 있어 좀 아쉬움이 많이 남는 전시이기도 하다...
사진촬영도 금지 되었던 터라 오랜만에 초등학생처럼 메모하며 구경했던 전시 ^^

시각적인 감성없이는 빛도 없으며 또한 움직임도 없다. 자연 속에서의 빛은, 색상들의 움직임을 만들어 낸다. - 로베르 들로네
=> 추가설명(Robert Delaunay)
시각적인 것 뿐만 아닌 청각적인 소리도 음악도 이와 같은 듯 싶다.



Lot 132, "Air, fer and eau, etude," by Robert Delaunay, gouache over pencil on paper laid down on panel, 19 5/8 by 33 5/8 inches, 1937

그림출처 : thecityreview

호안 미로의 변신

샤갈의 잠자는 여인과 꽃 / 야곱의 꿈


끌로드 모네의 장미정원이 있는 집

에리히 헤켈의 나무 옆에 서 있는 여인


오토 뮐러 물가의 벗은 여인들 / 들판의 세 소녀

오스카 코코슈가의 누워있는 누드 / 과일과 새가 있는 정물

에밀놀데의 강가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의 컵을 든 소녀 / 실내의 두 나부

이리히 헤켈의 누워있는 인물


아우구스트마케의 테게른 호수의 요트 놀이

프란티세크 쿠프카의 상승

로베르 들로네의 미의 세 여신

나탈리아 곤차로바의 공작새

요하네스 이텐의 빛의 서클


폴시냑의 베니스의 핑크 빛 구름


프란츠 마르크 의 잠자는 양기치 소녀


폴 세잔의 노르망디 농장

등 많은 작품이 눈에 들어오는 것들을 제목과 작가만이라도 적어 두웠다. 하나씩 찾아 보고 살 좀 붙여 봐야겠다. ^^ (맘에 드는 작품을 볼 때면 나도 언젠가는 마음에 드는 작품을 갖을 수 있겠지? 꼭 마주하고 사는 날이 오겠지 하며 그날을 꿈꾸어 본다.)

요즘은 정말 주말에 전시회 가는 건 좀 미친짓 같기도 하다. 이제는 평일 관람도 가능해 졌으니 시도해 봐야 겠다. ^^ (생각만으로 기쁘다 ㅋㅋ)
전시관람이 여유롭게 이루어 져야 하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 물밀려 가듯 어수선한 상황이 발생된다.
그래도 남녀커플이 전시회를 둘러보며 작품을 함께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봤을 때는 나의 바램인지 얼마든지 나의 아량이 넓어지지만 서로 아무 말도 없이 보는 커플을 보고 있노라면 왜 같이 왔을가 싶기도 하고... 이 또한 나의 오지랖, 나의 편견 일런지도... 사람마다 다른 것을...
이 또한 내가 보고픈대로 보고, 익숙한 것들에 대한 습관이겠지, 익숙한 것에는 그만 열중하고 좀 더 다양하게 접해 보는 것이 우선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눈을 뜨고 귀를 열고 편식 없도록...

창조가 있기 전에 먼저 파괴가 있어야 한다. 고상한 취향이란 얼마나 불괘한 것인가!
그 취향이란 창의력의 적이다. - 피카소 파블로

참고 : 독일의 표현주의 (클릭)

출처 : 네이버, 피카소와 모던 아트 홈페이지

우리는 국악을 얼마나 알고 있나

국립국악원에서 발간하는 '국악누리' 이번 호에서 눈에 확 뜨인 글이 있었다. 이윤주 님(국립국악원 학예연구사)이 쓴 '국악에 다가서기 첫걸음- 찾아보세요'라는 제목의 원고 가운데 일부를 인용한다.

다음은 서울대학교 국악과 출신인 문성모 목사가 독일의 한인교회에서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국악에 관한 강연을 할 때 '한국적인 자각을 위한 질문'이라는 제목으로 서양음악과 국악을 비교하는 문제에 사용한 질문입니다.

1. 바하를 아십니까? 우륵을 아십니까?

2. 운명 교향곡을 아십니까? 수제천을 아십니까?

3. 소나타 형식을 아십니까? 도드리 형식을 아십니까?

4. 바이올린은 몇 줄입니까? 거문고는 몇 줄입니까?

5. 오선보를 아십니까? 정간보를 아십니까?

6. 평균율은 무엇입니까? 삼분손익법이 무엇입니까?

7. 도.레.미.파.솔이 무엇입니까? 황.태.중.임.남이 무엇입니까?

8. 장조와 단조는 무엇입니까? 평조와 계면조는 무엇입니까?

9. 레시타티브는 무엇입니까? 아니리는 무엇입니까?

10. 고전파. 낭만파는 무엇입니까? 아악. 당악. 향악은 무엇입니까?

11. 현악4중주의 악기편성은? 삼현육각의 악기편성은?

12. 겨울나그네를 아십니까? 치화평을 아십니까?

13. 전람회의 그림을 아십니까? 영산회상을 아십니까?

14. 가곡 보리수의 가사를 아십니까? 가곡 초수대엽의 가사를 아십니까?

15. 카루소를 아십니까? 임방울을 아십니까?

16. 로렐라이 언덕을 불러보십시오. 진도 아리랑을 불러보십시오.

17. 당신은 독일 사람입니까? 당신은 한국 사람입니까?

문 목사는 5분의 시간을 주고 국악에 대한 문제 중 3개 이상 정답을 맞히는 사람에게는 선물을 주겠다고 했고, 음악애호가라고 자처하는 많은 사람들이 서양 음악에 관한 질문에는 거의 정답을 맞혔다고 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독일 사람입니까? 당신은 한국 사람입니까?" 문제를 제외하고는 국악에 대해서는 정답을 아는 이가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셨는지? 나는 국악을 세 문제 이상 맞히긴 했으나, 명색이 문화부 음악 담당 기자로서 결코 자랑할 수준은 아니다. 질문을 읽어 내려가며 새삼 깨달았다. 서양음악에 비해 국악에 대한 지식이 얼마나 부족한지. 글쓴이는 단지 '우리 것이 소중하다'는 식으로 애국심을 자극하는 접근은 그 자체로 부담될 수 있으니, '음악도 음식처럼, 편식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여러 장르의 것을 섭취한다고 생각'하는 게 좋을 것이라고 했다.

글을 읽다 보니 생각나는 일이 있었다. 영국 연수 시절 알고 지냈던 친구(프랑스인이다)가 지난해 여름 한국에 놀러 왔다. 영국에 있을 때, 우연히 들었던 가야금 소리가 좋았다고 해서 내가 갖고 있던 황병기 음반을 선물했더니 굉장히 기뻐했던 친구다. 청계천에 같이 놀러 갔는데, 한참 걷다 보니 어디선가 풍악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엔 '근처에 무슨 문화행사가 있나?' 하고 고개를 갸웃했는데, 정조대왕의 의전행렬을 그린 '정조반차도'가 벽화로 그려진 구간에 울려 퍼지는 음악 소리였다.

정조반차도는 사도세자의 회갑을 기념하기 위해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화성과 현릉원을 다녀오는 의전 행렬을 그린 것이다. '이 음악이 뭐냐'고 묻는 친구에게 '아마도 궁중의 행사음악인 것 같다'고 대답해 줬다. 친구는 크게 흥미를 보이며 이 음악을 휴대전화로 녹음해 갔다. 주변 소음 때문에 들을 만하게 녹음되지는 못했지만.

이 친구가 영국에 돌아간 후, 나는 음반을 하나 사서 보내줬다. 영국인 음악학자 존 레비(1910~1976)가 1964년 한국에서 녹음했던 한국 전통음악 컬렉션 가운데 한 장, 'Court Music(궁중음악)'이라는 제목이 붙은 음반이었다. 영문 해설이 잘 돼 있는 것 같아 골랐던 음반이다. 지난해 복원 발매된 명반으로 알려져 있는데 정작 나는 이 음반을 들어보지 않았다. 친구는 요즘 열심히 이 음반을 듣고 있다고 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가 청계천에서 들었던 음악은 취타-대취타-함녕지곡이었다. 취타와 대취타는 관악기와 타악기로 연주되는 행진음악이며 '편안함이 두루 미친다'는 뜻의 관악합주곡 '함녕지곡'은 관악영산회상 8곡 가운데 일부를 연주할 때 불리는 이름이다. 궁중에서 많이 사용된 음악이니, 내가 '궁중음악' 음반을 사 보낸 건 헛짚은 건 아니다. 하지만 존 레비 컬렉션에는 '관악 영산회상'이 따로 나와있으니, 청계천에서 들었던 그 음악을 다시 들려주려면 '관악 영산회상' 음반을 샀어야 했다.

이윤주 님의 글을 읽으면서 존 레비 컬렉션, 외국인 친구한테만 사 줄 것이 아니라, 나야말로 사서 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고로, 궁중음악은 포함돼 있지 않지만, 이윤주 님이 글에서 추천한 초심자용 국악 음반을 소개한다. 본격적 국악이라기보다는 크로스오버에 가까운 음반들이 많다. 이 중에는 내가 들어본 음반들이 꽤 있으니 그나마 다행스럽다고 해야 할까. 문화부 기자, 하면 할수록 공부할 게 많아지는 느낌이다.

슬기둥 「캐롤」, 공명 「통해야」, 숙명가야금연주단 「베스트 셀렉션 2006」, 그림 「아침풍경」김용우 「소리꾼 김용우 10년지기」, 정수년 「공(空)」, 양방언 「Pan-o-rama」


최종편집 : 2011-01-13 17:01 글쓴이 SBS 김수현기자

출처 : SBSnews

낮과 밤 - 홍상수

홍상수 이젠 찌질남을 넘어 찌질녀까지 손을 대는 구나...
나 또한 찌질녀는 아닌지, 당신 또한 찌질남은 아닌지...
낮과 밤, 밤과 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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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기를 위반한 남자와 기적을 행하는 여자 이야기

펠라 쿠티 [Fela Antikulapo Kuti ]

나 또한 이 세상에 더비지터는 아닌지...

더비지터 리뷰 추천
더비지터 리뷰


더 비지터에 나온 앨범 Fela 'Ransome' Kuti - Open & Close (1971)
나이지리아의 음악가. 미국의 블루스·재즈·펑크를 전통적인 요루바 음악과 융합시켜 아프로비트라는 아프리카풍의 현대음악을 만들어냈다. 급진적 음악가이자 정치가로서 1960년대 아프리카에서 가장 유명한 스타 중 하나이다.

본명 펠라 란소메 쿠티
별칭 흑인 대통령
국적 나이지리아
활동분야 음악
출생지 나이지리아 아베오쿠타
주요작품 《업사이드 다운》 《멍키 바나나》
주요업적 아프로비트 음악 창시

미국의 블루스·재즈·펑크를 전통적인 요루바 음악과 융합시켜 아프로비트(afro-beat)라는 아프리카풍의 현대음악을 만들어냈다. 본명은 펠라 란소메 쿠티였으나 이 이름이 식민주의적이라고 거부하여 펠라 안티쿨라포 쿠티로 개명하였는데, 이는 ‘부적으로 죽음을 통제하는 사냥꾼’이라는 뜻이다. 또 뒤에는 ‘흑인 대통령(Black President)’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다.

1938년 나이지리아 라고스 북쪽의 아베오쿠타에서 목사이자 피아니스트인 아버지와 여성운동가이자 정치운동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중산층 가정에서 성장한 펠라는 어린 시절 피아노와 타악기 주법을 배웠으며, 1958년 영국 런던으로 의학을 공부하러 떠났다가 트리니티칼리지에서 클래식 음악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유럽 고전음악을 공부하는 데 취미를 못 느껴 학교를 그만두고 ‘쿨라 로비토스 Koola Lobitos’라는 밴드를 조직한 뒤 연주활동을 하였다. 이때 펠라는 자신의 음악을 아프로비트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1960년대 말 펠라는 ‘크림(Cream)’과 ‘블라인드 페이스(Blind Faith)’라는 전설적 록밴드의 드러머인 진저 베이커(Ginger Baker)와 만나면서 인간적·음악적으로 교류하였고, 또 한편으로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산드라 이시도어(Sandra Isidore)와 만났다. 흑인 급진단체 블랙팬더당과 관련을 맺고 있던 이시도어는 펠라에게 맬컴엑스(Malcolm X)와 엘드리지 클리버(Eldrige Cleaver) 등의 저작을 소개하는 등 흑인 내셔널리즘과 아프리카중심주의를 접하게 해주었다. 밴드의 이름을 ‘나이지리아 70(Nigeria 70)’으로 바꾸고 자신의 성(姓)을 ‘안티쿨라포’로 개명한 것도 이시도어와 만난 뒤의 일이었다.

1970년 나이지리아에 정착한 펠라는 ‘칼라쿠타 공화국(Kalakuta Republic)’이라는 공동체를 만들고 그와 동시에 밴드의 이름을 다시 ‘아프리카 70(Afrika 70)’으로 바꾸었다. 그리고는 소울과 펑크에 요루바 음악의 동태적 리듬을 결합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펠라는 주로 영어로 노래불렀지만 억양이 독특하고 요루바어가 섞여 있어서 미국의 흑인음악과는 조금 다른 느낌을 주었다. 그는 뚜렷한 멜로디를 노래하기보다는 주술을 외우듯 툭툭 내뱉는 스타일로 노래하였다.

1960년대 후반부터 펠라는 자신의 음악을 나이지리아 군사정권의 억압에 항의하는 수단으로 이용했으며, 이후 아프리카에서 가장 유명한 스타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의 노래는 실업자와 하층민, 피억압 민중의 감정을 교묘하게 흔들어 그들의 심금을 울렸다. 그와 더불어 군사정부의 탄압도 시작되었다. 1973년부터 정부의 감시를 받던 펠라는 1974년 대마초 소지 혐의로 50명의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1977년에는 1,000명의 군인들이 펠라의 집을 습격하여 불을 지르고, 동료와 가족들을 폭행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펠라는 사건 직후 잠시 가나로 망명했다가 돌아와 1979년 국민운동(Movement of the People)이라는 정당을 결성하여 나이지리아 대통령 선거에 후보로 나섰지만 실패하였다. 그뒤 1980년 민간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음악 활동에도 자유가 보장되었다. 이 시기에 밴드는 ‘이집트 80’으로 개명하였는데, 이때 발표된 《흑인 대통령 Black President》(1981)과 《Original Sufferhead》(1984) 등은 미국을 비롯한 서구 시장에도 소개되면서 펠라의 최고작이 되었다. 이 작품들에서 펠라의 음악은 아프리카 음악도, 아메리카 음악도 아닌 독창적인 스타일을 확립하였다.

그러나 1983년 나이지리아에서 다시 군부 쿠데타가 발생하면서, 1984년 펠라는 라고스 공항에서 외화 도피 사건으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가 국제사면위원회의 노력으로 18개월만에 석방되었다. 석방 뒤에도 펠라는 음악활동을 계속해 나갔으나, 이러한 정치적 탄압과 더불어 후천성면역결핍증(AIDS)과 싸워야 했다. 그 와중에서도 그는 ‘결코, 결코 멈추지 말고 싸워라(never, never stop fighting)’라는 감옥에서의 선언과 ‘음악은 미래의 무기(Music is the Weapon of the Future)’라는 평소의 신조를 실천해 나갔다. 펠라는 1997년 군부에 의해 마리화나 소지 및 복용으로 연행되어 일주일 정도 구속된 뒤 석방되자마자 죽었다.

그는 공적 생활에서는 존중받는 급진적 음악인이자 정치인이었지만, 사생활에서는 가부장주의적이고 성차별주의적인 가장이었다. 28명의 부인과 결혼하였고 나중에는 그들 모두와 이혼하였으며, 아들인 페미 쿠티에게 밴드를 상속하기도 하였다.

주요작품에 고속도로를 건설하기 위해 토지를 수용하려는 정부를 비꼬는 《천천히 다녀라 Go Slow》(1975), 군인과 정치인들을 풍자한 《좀비 Zombie》(1977), 정부의 난폭함과 관료의 무능을 꼬집은 《업사이드 다운 Upside Down》 등을 비롯하여 《멍키 바나나 Monkey Banana》 《국적 없는 짐승들 Beasts of No Nation》 《Everything Scatter》 등의 사회적 저항정신을 엿볼 수 있는 노래가 있다.

출처 : 두산 엔사이버

아시아 리얼리즘

주제 1 : Realism as a means of representation
새로운 재현 형식으로서의 리얼리즘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 대부분 식민지적 상황에 놓여있었던 아시아 국가들은, 3차원적 대상을 마치 사진으로 보듯이 “재현”하는, 새롭고 근대적인 “기술”의 하나로서 서구 미술을 받아들였다. 르네상스적 원근법이 적용된 풍경이나, 세밀하게 묘사된 초상화들이 그러한 서구에의 충격을 반영한다. 당시 “리얼리즘”은 무엇보다 “있는 그대로”의 시각적 경험을 평면에 옮기는 기술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예술가들은, 자국의 미술사적 전통과 서구의 기법 사이의 접점을 찾으려는 다양한 노력을 보이기도 했다.



다카하시 유이치, 일본, <오이란(花魁)>, 1872년, 캔버스에 유채, 77 x 55cm,도쿄예술대학미술관 소장
Takahashi Yuichi, Japan, Courtesan, 1872, Oil on canvas, 77 x 55cm, Collection of Tokyo University of the Arts, Japan

일본은 19세기말 메이지 유신 시기 모든 분야에 있어 서구 문물을 배우기 위한 체계적인 변화를 꾀하였고, 미술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이 무렵 다카하시 유이치는, 일본에 초빙된 이탈리아 화가 안토니오 폰타네지 등에게서 유화를 배우기도 했지만, 거의 독학에 가까운 방식으로 자신의 기법을 찾아냈습니다. 이 작품은 유곽의 위계 높은 기생 “오이란”을 그린 초상화입니다. 대상을 아름답게 보이게 하려는 의도 없이, 나이가 든 기생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고 “기록”하는 일에 충실하고자 했습니다. 대상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집요한 태도는, 전통회화와는 사뭇 다른 새로운 “리얼리즘”적 시도로, 서양화에 대한 당대의 열광을 반영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작가는, 광대뼈가 튀어나온 얼굴 부분의 묘사를 위해 연백(鉛白)을 덧칠하는 등 전통 기법을 접목하기도 했습니다.




응우옌기어찌, 베트남, <베트남 풍경>, 1940년, 보드에 옻칠, 159 x 119cm, 싱가포르국가유산위원회 소장
Nguyen Gia Tri, Vietnam, Landscape of Vietnam, 1940, Lacquer on panel, 159 x 119cm, Collection of National Heritage Board, Singapore

응우옌기어찌는,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받았던 베트남의 하노이에서 1925년 설립된 인도차이나 미술학교에서 수학했습니다. 재학 중 휴학을 하고 독립 운동에 투신하기도 했습니다. 빅토르 타르디유(Victor Tardieu) 등 유명한 프랑스인 화가들에 의해 교육된 이 학교는 비록 유럽의 인상주의를 가르치기도 했지만, 비단이나 옻칠 등 베트남 고유의 매체를 이용한 베트남식 양식을 개발할 것을 권장하기도 했습니다. 전통 옻칠기법을 활용한 이 작품은, 원경의 산과 근경의 식물들을 매우 효과적으로 배치한 풍경화입니다. 흑, 적, 금색의 전통적 색채를 기본으로 하여, 여러 개의 색층을 겹쳐 제작한 옻칠화이지만, 화면 구성과 원근법은 다분히 서양의 재현 방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베트남 고유의 전통과 서양 모더니즘의 독특한 결합방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배운성, 한국, <가족도>, 1930-35년, 캔버스에 유채, 140 x 200cm, 전창곤 소장
Pai Un-soung, Korea, A Big Family, 1930-35, Oil on canvas, 140 x 200cm, Collection of Jeon Chang Gon, Korea

일본 식민지 시대 서울에서 한 갑부 집안의 집사로 일했던 배운성은, 그 집안 아들의 유학 길을 동반하는 목적으로 1919년 일본, 1922년 독일을 가게 됩니다. 독일 베를린에서 유화와 판화를 공부하고, 1937년 이후 파리에서 활동했던 그는, 유럽에서 상당히 성공적인 작가가 되었습니다. 1940년 귀국한 후 한국전쟁 중 월북한 그는, 실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던 한국 근대기 작가 중 한 사람입니다. 독일 체류 중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이 작품은, 작가가 한국에서 주인으로 모셨던 집안의 대가족을 소상하게 묘사한 것입니다. 집사 출신인 작가 자신의 모습도 화면 제일 왼쪽에서 작품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습니다. 마치 사진을 보고 그린 것 같기도 하고, 혹은 사진의 기능을 대체할 목적으로 회화가 그려진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철저하게 기록적인 성격이 작품의 사실주의적 태도를 반영하는 한편,윤곽선을 그리고 그 안에 채색하는 기법은 전통 회화의 백묘법을 연상시키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주제 2: The Rural as an Attitude and Metaphor
은유와 태도로서의 향토

20세기 전반, 대부분 식민지적 상황 속에서 “민족”에 대한 인식이 자라났다. 고단한 현실 속에서도, 자국 민족의 오랜 삶의 터전인 농촌 생활의 묘사는 일종의 향수와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평화롭고 아름답게 묘사되는 “향토”의 이상화된 이미지는, 한편으로 현실도피의 도구가 되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스스로 터잡고 있는 주변의 자연과 환경에 대해 진정 어린 관심은, 어떠한 구조적 한계 속에서도 자발적인 민족의식을 찾아가고자 했던 예술가들의 고투를 읽게 한다. 이는 이 주제가 오랫동안 여러 아시아 국가에서 유행하고 사랑 받는 근거가 된다.




아사이 추, 일본, <농부귀가>, 1887년, 캔버스에 유채, 135.5 x 98.5cm, 히로시마미술관 소장
Asai Chu, Japan, Farmer Returning to Home, 1887, Oil on canvas, 135.5 x 98.5cm, Collection of Hiroshima Museum of Art, Japan

메이지 시대의 서양화가인 아사이 추는, 공부미술학교에서 이탈리아 교수인 안토니오 폰타네지에게서 서양화법을 배운 적이 있고, 도쿄미술학교 교수를 지냈으며,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를 계기로 프랑스로 가서 2년간 체류하기도 했습니다.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농부 일가족(엄마, 아빠, 딸)의 모습을 담은 이 작품은 농촌의 일상적인 한 순간을 포착한 그의 다른 작품들과 함께, 프랑스의 화가 밀레의 강한 영향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의 스승이었던 이탈리아 화가 폰타네지 또한 바르비종 화파의 목가적인 전원생활을 주로 그렸습니다. 이들의 작품은 농부들의 힘겨운 일상적 순간에, 거의 종교적이라 할만큼의 경건함을 부여했습니다. 한편, 아사이 추는 볏짚을 담은 지게, 주전자, 삼태기와 멱서리 등 농촌생활의 모티프 하나하나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이인성, 한국, <해당화>, 1944년, 캔버스에 유채, 228.5 x 146 cm, 리움 삼성미술관 소장
Lee Inseong, Korea, Sweet Briers, 1944, Oil on canvas, 228.5 x 146 cm, Collection of Leeum, Samsung Museum of Art, Korea

이인성은 대구의 유화가 1세대들의 화실에서 어깨너머로 그림을 배워서 조선미술전람회에 연이어 수상하는 등 어릴 때부터 천재화가로 불렸습니다. 1930년대 초 일본 유학 후 왕성한 활동을 펼치던 이인성은 한국전쟁기인 1950년 취기로 벌어진 경찰과의 사소한 시비로 총에 맞아 숨진 불운의 화가였습니다. 1944년 마지막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된 그의 작품 <해당화>는 같은 해에 숨진 만해 한용운의 시 “해당화”를 떠올리게 합니다. 봄은 지나갔으나 오지 않은 “님”을 기다리며 어찌할 바 없는 애잔한 심사를 그린 한용운의 시와 이인성의 그림은, 식민지 말기 한국 상황을 너무나도 잘 대변하고 있습니다. 바닷가 모래밭에 피는 해당화, 바다 위 조각배, 평화로이 거니는 말, 나뒹구는 조개 껍질 등은 어딘가를 향한 여인의 표정과 함께 그 무엇에 대한 갈망과 희구를 은유적으로 담고 있습니다.



조셋 첸, 싱가포르, <사테 파는 소년> , 1964년, 캔버스에 유채, 135 x 161cm, 싱가포르국가유산위원회 소장
Georgette Chen, Singapore, Satay Boy, 1964, Oil on canvas, 135 x 161cm, Collection of National Heritage Board, Singapore

조셋 첸은 중국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미국, 유럽에서 수학하면서 일찍부터 서구식 교육을 받았습니다. 싱가포르 첫 외교부장관의 아내였으나 남편의 이른 죽음 이후 불운한 삶을 살면서 작품 활동을 계속했습니다. 오랫동안 싱가포르 난양 미술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은 말레이시아의 지역 음식으로 고기나 해산물을 꼬치에 꽂아 숯불에 구워먹는 꼬치요리인 “사테”를 해변에서 팔고 있는 남자아이를 소재로 한 것입니다. 주변에서 흔히 벌어지는 사소한 일상과 지역의 생활을 담았다는 점에서 당시의 지역주의 경향을 반영합니다.
지금 여기의 우연한 한 순간을 포착한 듯 보이지만, 인물의 배치, 의상, 모자 등의 색채와 패턴은 면밀하게 계산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더니즘 회화 언어를 완숙하게 소화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양즈광, 중국, <눈 내리는 밤에 식사 배달하기>, 1959년 종이에 채색,
292 x 120 cm, 광동미술관 소장
Yang Zhiguang, China, Meal Delivery at a Snowing Night,1959, Color on paper, 292 x 120 cm, Collection of Guangdong Museum of Art

양즈광은 중국화가인 가오젠푸(高劍父)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회화 공부를 시작했고, 이후 쉬베이홍이 지도하는 중앙미술학원에 입학하여 서양화 교육을 받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서양화의 사실주의적 테크닉을, 중국화 고유의 매체에 적용하여 명성을 얻었고, 1950년대 국화운동의 핵심적인 역할을 한 작가가 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1958년 마오쩌둥이 이끈 대약진운동을 배경으로 제작된 것으로, 근대화 되어가는 농촌의 모습을 주제화한 것입니다. 눈 내리는 밤에도 불을 밝혀가며, 저 멀리 트랙터 일꾼에게 야식을 전달하려는 생산대 여성 일원과 대장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힘든 노동의 현장을 그리면서도 언제나 “긍정성”과 “서정성”을 담아내는, 대 약진기 미술의 특징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농촌의 서정적 주제가 급부상하고 중국화의 가치가 부활하는 것도 이 시기 중국미술의 새로운 판도를 반영합니다.


주제 3 : Hail the Worker! 노동자를 환호하다

노동자를 비롯하여 사회적으로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이 미술 주제의 전면에 등장하는 것은,
아시아적 전통에 비추어볼 때 매우 새로운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1920-40년대의 폭발적인 시기를 중심으로, 거리의 걸인, 노동자, 농민, 일반 민중의 삶에 미술이
함께 해야 한다는 인식이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에서 중요한 흐름을 형성했다. 이러한 인식은
제 2차 대전 이후에도 중국과 같은 공산주의 국가에서 극단적인 지점으로까지 나아갔다.
노동자, 농민, 예술가, 지식인 계층의 구분 자체를 부정한 채, 노동자 이미지를 영웅화하는 작업이 계속된다.





트루부스 수다르소노, 인도네시아, <병아리와 함께 있는 여자>, 1960년, 캔버스에 유채,
137 x 68cm, 싱가포르국가유산위원회 소장
Trubus Sudarsono, Indonesia, Women with Chicks, 1960, Oil on canvas, 137 x 68cm, Collection of National Heritage Board, Singapore

트루부스는 인도네시아의 민족적 미술경향을 대변하는 수조요노와 함께 민중의 화가(People's Painter) 그룹에서 활동했습니다. 식민지배자의 시선이 아닌, 실제 민중의 언어로 회화를 그려야 한다는 믿음 속에서, 그는 인도네시아의 토착적 주제에 몰두했습니다. 병아리와 함께 있는 작품 속의 여인은 자바인의 전통의상인 블라우스 케바야(kebaya)를 입고 있습니다. 이 주인공의 친척으로 보이는 다른 여성이 머리를 빗겨주고 있는데, 그녀는 자바 전통의 머리핀인 콘데(konde)를 장식할 머리 매듭을 짓기 위해 오랜 빗질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들이 아마도 결혼식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화면 아래 막 껍질을 깨고 나온 병아리가 암시하고 있습니다. 주인공 여인의 인상적인 눈빛은 일반적인 민중의 소박한 의식을 더욱 의미심장하게 만듭니다.



암리타 세르길, 인도, <어머니 인도>, 1935년, 캔버스에 유채, 78x 62.5 cm, 인도국립근대미술관 소장
Amrita Sher-gil, India, Mother India, 1935, Oil on canvas, 78x 62.5 cm, Collection of National Gallery of Modern Art, India

암리타 세르길은 인도 근대미술사의 전설적인 여성화가로, 파리 국립미술학교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1941년 2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리 많지 않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직접 거리에서 그린 사생 스케치를 토대로 보통의 민중들에 대한 섬세한 관찰을 담고 있는 그의 작품은 당시 인도화단에서는 매우 예외적인 것이었습니다. 작가의 완숙기를 대표하는 이 작품은 사리를 입고 아이들에 둘러싸여 있는 한 어머니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식민지 시대 인도의 이미지를 다소 신비주의적인 터치로 처리했던 다른 그림들과 비교할 때 이 작품의 가치는 더욱 빛을 발합니다. 작가는 길에서 마주친 보통의 어머니의 모습에서 인도를 표상하는 강력한 힘을 발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윈화, 중국, <구리광산의 첨병(采铜尖兵)>, 1971년, 캔버스에 유채, 220 x 201cm, 지그 컬렉션
Wu Yunhua, China, From the Tiger's Mouth, 1971, Oil on canvas, 220 x 201cm, Collection of Uli Sigg

우윈화는 흑룡강성 출신으로, 션양 루쉰 미술 학원와 북경 중앙예술학원을 졸업한 후 유화가로 활동했습니다. 문화혁명기 광산지역으로 가서 실제로 광부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대부분 사회주의 국가의 노동 장면을 묘사한 작품을 그렸습니다. 목숨을 건 위험을 무릅쓰고 광산에서 광물을 캐는 광부의 모습을 담은 이 작품은, 1966년 시작되어 약 10년간 지속된 중국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 시기의 미학적 원칙을 충분히 반영한 대작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사실적으로 그릴 것, 연극 중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역동적으로 묘사할 것, 주인공을 특히 강조하여 영웅화할 것, 인물의 경우 “홍, 광, 량(紅-光-亮)”, 즉 “붉고, 밝고, 빛나도록” 묘사할 것 등의 원칙이 충실하게 지켜졌습니다. 화면의 한가운데를 차지하는 두 주인공은 헌신적으로 노동에 집중하며, 국가의 산업과 미래를 책임지는 영웅의 이미지를 표상하고 있습니다.

주제 4 : Impact of War 전쟁과 리얼리즘

아시아의 국가들이 20세기에 직면했던 가장 영향력 있는 현실 중의 하나는 “총력전”으로서의 세계 대전의 포화 속에 있어야 했다는 사실이다. 2차대전 이후에도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한국전쟁, 베트남전 등 크고 작은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전쟁”은 누구에게나 쉽게 이해되는 미술형식으로서 “리얼리즘” 회화가 유행하는 중요한 이유를 제공했다. 전쟁 상황을 기록하고, 전후의 처참한 현실을 고발하며, 승전을 기념하고 선전하는 목적을 위해 리얼리즘 회화는 유용한 수단이 될 수 있었다.




시미즈 토시, 일본, <말레이 가교 공병대>, 1944년경, 캔버스에 유채, 159.5 x 129cm, 도쿄국립근대미술관 소장
Shimizu Toshi, Japan, Engineering Corps Constructing a Bridge in Malaya, c 1944, Oil on canvas, 159.5 x 129 cm, Collection of National Museum of Modern Art, Tokyo

시미즈 토시는 1907년 미국으로 건너가 노동자로 각지를 전전했습니다. 미국 애쉬캔 화파의 대표적 작가인 존 슬론에게서 배웠고, 1927년 이후 일본에 귀국하여 이과전 등에서 활동했습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했을 때 종군작가로 상하이에 건너갔고, 1945년 장남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접한 후 같은 해 생을 마감했습니다. 1942년 말레이 반도를 종단했던 일본군을 막기 위해 폭파된 다리를 공병대가 단 2일만에 성공적으로 보수하여 진격을 도왔다는 일화가 신문에 대서특필된 바 있습니다. 이 작품은 당시의 보도사진을 근거로 2년 후인 1944년 육군미술협회의 주문에 의해 제작되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작가는 일본군에 협력하는 말레이 현지인들의 모습을 그림 뒤편에 의도적으로 삽입함으로써, 전쟁의 정당성을 강화시키고 있습니다. 병사들의 강인한 근육을 영웅적으로 묘사할 뿐 아니라, 물속에서 기둥을 지탱하는 병사들의 “고통”에도 밀착하는 태도가 주목을 끕니다.

주제 5: Social Commentary and Criticism
사회 인식과 비판 새로운 리얼리즘을 향하여

20세기 후반 대부분 식민지적 상황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였지만, 여전히 식민지적 사회구조의 반복, 정치적 부정, 이데올로기의 갈등은 지식인으로서의 예술가에게 다양한 예술적 화두를 제공했다. 공산주의를 제외한 대부분 아시아 국가에서 1950-60년대 추상미술이 “제도화”되는 시기를 거친 후, “리얼리즘” 논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등장했고, 한국, 필리핀, 타이,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사회 현실에 대한 비판과 발언을 예술의 존재 근거로 주장한 “새로운 리얼리즘” 운동이 일어났다.




오윤, 한국, <가족 II>, 1982년, 캔버스에 유채, 131 x 162cm, 개인 소장
Oh Yun, Korea, A Family II, 1982, Oil on canvas, 131 x 162cm, Private Collection, Korea

부산 출신의 작가 오윤은, 1960년대 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재학시절부터 사회의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미술운동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당대의 문학인, 민중운동가 등과 교유하면서 판화, 삽화, 걸개그림 등 대중적이고 보급이 빠른 미술매체를 제작하였고, 현실비판적인 작업들을 남겼습니다. 1986년 40세의 나이로 요절했지만 한국의 민중미술사에서 가장 존경 받는 화가에 속합니다. 그의 작품 <가족>은 빠른 속도로 도시화한 1980년대 한국 사회에서 대략 일반화된 한 가족의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노 부부는 농촌을 지키고 있지만, 성장한 자녀들은 모두 도회지로 나서 자장면 배달, 술집 점원, 공사장 인부와 같이 쉽게 뛰어들만한 직업을 택합니다. 무표정하게 관객을 바라보는 가족 구성원들은, 급격한 속도로 현대화된 사회에서 소통부재의 불균형한 현실을 씁쓸한 기분으로 직면하게 합니다.



이종구, 한국, <속·농자천하지대본>, 1984년, 쌀부대, 170 x 100cm,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Lee Jong-gu, Korea, Sequel-Agriculture Formsthe Basis of the World’s Existence, 1984, Acrylic on rice paper, 170 x 100cm, Seoul Museum of Art, Korea

이종구는 충남 서산시 오지리에서 태어나 중앙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고 1980년대 초반부터 민중미술운동에 참여했다. 고향 오지리에서 농부로 생활하는 작가의 아버지를 소재로 한 이 작품은, “풍요로운 농부”의 선전적인 이미지 대비를 이루면서, 늙고 힘들고 고통에 겨운 “실제” 농부의 모습을 보여준다. 쌀부대 종이를 그대로 활용하여, 그 위에 매우 사실적인 기법으로 초상화를 그리고, 농업을 권장했던 국가로부터 아버지가 받은 상장들, 힘든 일상을 진솔하게 담은 아버지의 편지 등을 콜라주 했다. 작가는 이상화된 농촌의 이미지와 실재하는 농촌의 현실이 지니는 괴리에 대해 지적 하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리얼리티”에 대한 인식 자체를 재고하도록 이끈다.




끼에띠삭 차논낫, 태국, <잠재의식 #1>, 1980년, 캔버스에 혼합재료, 153 x 100cm, 디사폴 찬시리 소장
Kiettisak Chanonnart, Thailand, Subconscious Mind #1, 1980, Mixed media on canvas, 153 x 100cm, Collection of Dr Disaphol Chansiri

끼에띠삭은 1965년 타이 실파꼰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1970년대 타이의 새로운 미술경향을 반영하면서
사회적, 정치적 이슈와 개인의 심리적 상태를 주제로 한 작업을 남겼습니다. 우울하고 황량한 공간에 놓인 해골, 비명을 지르는 얼굴과 밀폐된 방의 이미지 등이 그의 작품에 등장합니다.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발언을 하지는 않지만, 숨막히는 상황이 만들어내는 개인의 불안과 무의식이 주제화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작가가 대학시절 경험한 남동생의 의문의 죽음을 소재로 한 것입니다. 이차원의 사실적인 묘사와 삼차원의 오브제가 기묘하게 병치되고, 존재와 비 존재의 경계가 모호하게 처리되었습니다. 작가는 우리가 지금 보는 것이 실재가 아닌지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결국 무엇이 진정한 “실재”, “리얼리티”인가에 대한 물음에는 어떠한 객관적인 답변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질문 자체로 우리 앞에 놓여있는 것 같습니다.


출처 : 국립현대미술관

감사합니다. 보내주신 르몽드 디플로마띠크 초대권으로 잘 다녀왔습니다.

윤정희 주연, 시

장마라더니 올해는 비가 많이 내린 지도 모르겠고 정말 장마 막바지 인지
하얀 뭉게구름 그늘에서 살랑살랑 부는 바람은 한여름 날씨 같지 않다.
학교에 나무가 많고 자연을 만끽 할 수 있어서 그런지 도심에서 느낄 수 없는 여유로움이 참 좋다.
인공폭포지만 물이 흐르고 꽃이 피고 나비가 날아 다니고 새가 노래하는 것들을 보고 있자니 신선이 따로 없는 듯 하다.
이렇게 자연과 벗하고 있으니 지난달에 본 이창동 감독의 "시" 영화가 생각난다.
시를 잘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지만 영화 속에 윤정희가 꽃을 보고 자연을 보고 사물을 관찰하며 시를 쓰려고 노력하는 모습에서 간혹 내 모습이 읽혀지기도 했다.
그렇게 곱고 고운 윤정희 만큼은 아니지만 말이지...
스트레스를 잘 받지 않는 스타일이지만 마음이 울적하거나 머리가 복잡할때면 산책만큼 내 답답한 마음을 풀어 주는 것도 없다. 어찌보면 현실을 도피하려는 용감하지 못한 내 마음 일런지도 모르겠지...
현실 속에서 겁없이 뛰어드는 무모함 보다 생각만 생각만 늘어 놓는 모습이 더 나약해 보이니 말이다.
윤정희가 "시"에서 '어떻게 하면 시를 쓸 수 있나요? 시를 쓰는게 너무 어려워요.' 몇번이고 묻고 또 묻는다. 시를 써 보겠다고 노력하는 완성해 보겠다는 마음, 그 이상으로 삶에서 원하던 원치 않던 세상과 타협하게 되는 윤정희. 마음이 짠하게 느껴지기도 왠지 감당하기에는 조금 벅차게 느껴지기도 하다.
세월에 흔적을 고스란히 담아낸 윤정희였기에 이창동 감독의 "시"는 더욱 아름다웠던거 같다.
영화의 내용을 잘 요약해 놓은 이 포스트가 공감된다.
http://blog.naver.com/sohyang3029/20106423049
쉽게 보여지고 읽혀지지만 않았던 영화,
이창동 감독의 "시"



아네스의 노래

이창동


그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하나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래소리 들리나요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 당신이 받아볼 수 있나요

하지 못한 고백 전할 수 있나요

시간은 흐르고 장미는 시들까요



이제 작별을 할 시간

머물고 가는 바람처럼 그림자처럼

오지 않던 약속도 끝내 비밀이었던 사랑도

서러운 내 발목에 입 맞추는 풀잎 하나

나를 따라온 작은 발자국에게도

작별을 할 시간



이제 어둠이 오면 다시 촛불이 켜질까요

나는 기도합니다

아무도 눈물은 흘리지 않기를

내가 얼마나 간절히 사랑했는지 당신이 알아주기를

여름 한낮의 그 오랜 기다림

아버지의 얼굴같은 오래된 골목

수줍어 돌아 앉은 외로운 들국화까지도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당신의 작은 노래소리에 얼마나 가슴 뛰었는지



나는 당신을 축복합니다

검은 강물을 건너기전에 내 영혼의 마지막 숨을 다해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짬짬이 여유롭게...

오랜만에 영화리뷰 블로그를 열어보니 써놓은 리뷰조차도 한꺼번에 올려놓은거 하며, 얼마나 신경을 안썼는지 그동안 참 게으른 내 모습에 반성하게 된다. 이 영화리뷰 블로그를 만들때도 네이버에서 급 옮겨오는 바람에 기존에 영화를 무조건 가져오다보니 안타까운 부분도 발생하고 성의껏 다 정리하지도 못했었으니 할말이 없다....
다시 정신차리고 그동안 빠진리뷰를 먼저 챙겨볼까 시도하려다, 잘 생각해보니 그건 정말 아닌거 같다. 그럼 밀린 리뷰 작성하다 미루고 또 미루게 되어 게으름의 연속이 발목을 잡을꺼 같다.
그 모든것이 한꺼번에 몽땅 기억나는 것도 아닐테구, 그 감정을 다시 느끼지도 못할텐데...
이제는 짧게라도 그때 그때 작성하는게 젤 좋겠지만 부득이하게 내가 작성치 못할지라도 링크를 걸어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이제야 드는 건 뭔지..
우선 최근에본 영화부터 작성하면서 그동안 밀린 리뷰도 짬짬이 여유롭게 올려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꺼 같다.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내 건망증을 조금이라도 잡아보려는 노력은 영화리뷰를 작성하는거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으니...
앞으로는 좀더 신경써 관리를 좀 해보자.

Deux frères




빠리서 살때 울 집앞에 극장이 있었다.
극장전용 카드가 있기에 부담없이 언제든지 내 시간만 허락된다면 몇편이고 자유롭게 볼 수 있었지
이 영화 정말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대형극장 맨 마지막 시간대여서 였는지 10명 미만의 극장객 뿐이기에 자유로운 관람이 된다.
연인들은 뒤에서 봤던거 같고 난 가운데 좋은자리를 잡고 기대 없이 본 영화...
근데
이 영화의 감동은 정말... 아직도 눈시울이 뜨겁다
두형제가 이별을 하며 훈련을 받고 싸움을 하다 그들은 다시 만나 형제란 걸 알면서
서로 아끼고 교감하고...
(겁이 많은 호랑이 발에 낙엽이 붙고 걸음 걸이가 쉽지 않을때, 써커스서 배운거 함께 연습할때...)
두시간 가량 걱정하며 위로하며 울다가 웃다가 훌쩍거리며 보았던 영화.
손수건도 휴지도 없이 봤던터라 옷으로 눈물을 닦으며 엉엉 울며 봤었던 이 영화~
극장에 사람도 없고 대형극장이다 보니 나의 훌쩍거림은 극장안으로 왜 그리 울려 퍼지던지...
영화 보고 나올때 사람들은 나에게 안부를 묻고는 하였지 ^^
그 다음날 역시 나의 띵띵 부어 오른 눈은 꼭 개구리 같았다지...



한국서 아직 다시 보지 못했다.
그 동안 DVD로 구입을 못 해 온것이 안타까웠지만 조만간 구매하고자 한다.
가족들과 함께 볼 영화로 강추 하고 픈 영화.
동물을 싫어라 하는 사람들은 꼭 봐야 할 영화~ 투브라더스

게이샤의 추억

물은 대단해...
물은 돌이 있으면 비껴 흐르고 앞에 막혀 있는 것을 뚫기도 하니 말이지...
불을 끄고 흙을 쓸고 쇠를 녹슬게하니까...

태양에게 더밝게 비추라거나 비에게 덜 내리라고 말할 수는 없어

'상실'이란 시가 적힌 돌이 있었는데 어느 시인이 싯구를 다 긁어냈지
상실이란 읽는 게 아니라 느끼는 것이라고...

Memoirs of a Geisha, 2005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부모님 결혼기념일날 인터콘티넨탈서 함께 밥 먹고
늦은 저녁에 코엑스 메가박스에서 가족과 함께 본 영화
오늘 문득 이 영화가 생각 났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은 언제였는지?

2001년 여름? 2003년 봄? 2004년 9월?
부모님과 함께 유럽여행한 날들?
글쎄... 그런 특별한 날도 좋지
하지만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하는 그날
그날이 바로 우리 생에 가장 아름다운 날이 아닌지...
부모님과 건강챙기며 맛난거 먹고 즐겁게 웃고 사는 그 모습
이게 바로 행복인거 같다.

La maison de Himiko



히미코의 집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크다고...
아마 취중에 본 영화라...
울지는 않았지만...
기억에 남는 건 루비~
피키피키 피키~~


FOURBROTHERS



가족애로 뭉친 쿨한 가족영화? 복수극 ^^
근데 너무나 슬프게도 복수는 복수를 낳으며 진행되는 스토리...
피가 전혀 섞이지 않은 사회 문제아이들로 뭉쳐진 형제들
외모도 피부색도 성격도 모두 다른 쿨~한 4형제
아마도 양모의 선행밑에서 자란 형제들이기에 믿음과 사랑이 밑바탕되는 강한 힘
생각없이 보기에 정말 딱 좋은 영화~
복수하며 피터지며 폭력적이기에 무섭기도 했지만
영화 결말이 해피앤딩 아닌 해피앤딩이라 좋은 영화~

이문세독창회 IV


신나는 대한민국 만들기 프로젝트는 성공한듯 합니다.

너무나도 좋아라했던, 신나했던 3시간 가까이 되는 이문세 4번째 독창회
처엔 좌석땜에 에구~ 했는데 이렇게 좋은 좌석이 또 있으랴, 열심히 뛰고 부르고 춤추고...
그래서 더욱 가까웠던, 행복했던, 즐거웠던 ^^
영화 속 한 장면에서 멋지게 흘러 나오는 "사랑이 지나가면" 아름다운 배경? 소품들
또한 막바지의 멋지게 힘차게 흩날리는 붉은 극기(정말 압권 이였슴)
힘차게 율동하시는 한 동작 한 동작들이 모두 섹시하기 보다는 정말 귀여웠답니다.
오래간만에 보는 이문세,
건강하게 행복하게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 읽혀지더군요.
행복한 시간, 즐거운 시간, 신나는 시간이였습니다.
2년 후 또 기대됩니다.
신나는 대한민국 만들기 프로젝트에서 힘 받고 왔습니다~
2005. 시월애

가을소풍 다녀왔습니다




오래 간만에 외출했습니다.
처음가본 동물원과 함께하는 가을소풍
처음엔 달뜨고 10시라 하여 너무 늦은 시간이기도
날씨 또한 비가 온다하여 추울듯 싶어 정말 정말 가기 싫었죠.
모두 다 걱정뿐이였죠.
언제 비가 왔냐는 듯이 날씨도 좋구
동물원의 시적이고 아름다운 노래가사말
한동준게스트의 멋진 노래실력도 좋았구
(간만에 콘서트장서 노래한다는 한동준씨 다리가 아프다하더군요^^
근데 3곡의 노래는 저에게 너무 아쉬웠어요~ 아마도 관객 모두에게...)
다함께 손벽치며 할아버지와 시계, 솜사탕 등... 노래도 따라부르고
2시간 동안의 야외공연 너무나 아름다운 밤이였답니다. ^^
비가 안왔었다면 밤하늘에 수 많은 별들도 볼 수 있었을 텐데....
근데요 밤하늘에 반딧불이 있어 또 다른 멋이 있었답니다.
전 처음으로 반딧불도 봤는데요 너무나 이뻤답니다.

일본전통 가무극 노 - 하고로모 <羽衣>

2005.10.06 7:00 p.m.


Leeum에서 개관 1주년 기념 목요음악회로 일본전통 가무극 "노" 공연을 준비했다.
노 공연은 일본에 전통극 중 가장 오래된 장르라고 하는데 일본 전통극에 무지한 나로서는
음악을 이해 못해 처음 몇분간은 웃음을 참느라 조금 고생을 했다. ^^
귀족적인 화려함과 절제미가 살아 있는 일본의 전통 무대예술이라 하는데 화려함과 절제미라...
아마도 타악기와 관악기의 조화되지 않는 듯한 음악속에서 우리는 절제미를 느끼며
일본 전통의상의 화려함...
일본문화의 새로운 첫 만남은 나의 지루함과 졸리움을 모두 날려버렸다.
(솔직히 전날 충분한 수면을 취하지 못해 많이 걱정이 되었었는데 ^^)




아시아 유럽에서도 널리 전해져 오고 있는 「선녀와 나뭇꾼」류의 전설을, 노오 하고로모 <羽衣>는 가면에 의한 시극으로서, 선녀의 정결함과 우아함을 순도높게 표현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선녀와 나뭇꾼이였지만 섬나라 일본은 어부가 등장한다고 한다.
어부가 아름다운 선녀의 날개옷을 발견하여 가보로 삼으려 집으로 가져오려고 하자, 선녀가 하늘 나라의 날개옷이 없으면 하늘로 돌아갈 수 없다며 탄식했다.
어부는 선녀가 너무도 가없어서 하늘나라의 춤을 보여준다면 날개옷을 돌려주겠다고 하는데
날개옷이 없으면 춤을 출 수가 없다며 선녀는 돌려주기를 애원한다.
어부는 날개옷을 돌려주면 그대로 하늘로 날아가 버리는 것은 아닌가 의심하지만,
"의심은 인간세상에 있는 것, 하늘에 거짓이란 없습니다." 라는 선녀의 말에 부끄러워 하며 날개옷을 돌려준다. 선녀는 날개옷을 입고 청정무구하고 우아한 춤을 보이며, 지상에 여러 가지 보물을 내린 후, 봄안개에 싸여 하늘로 올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