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적인 풍요와 결과만을 쫓는 각박한 세상에서 수많은 이들에게 삶의 참된 의미와 여정의 중요성을 깨우쳐준 故법정스님. “선택한 가난은 가난이 아니다.”라는 청빈의 도를 실천하며, ‘무소유’의 진정한 가치를 널리 알려 온 故법정스님의 일대기와 가르침을 담은 "법정스님의 의자"는 성공과 실패만을 논하는 혼탁한 이 시대에 가련한 영혼을 일으켜 세우며 삶의 진실된 행복과 참된 가치를 일깨워 준 휴먼 다큐멘터리이다.
“법정스님의 의자”에 등장하는 의자는 법정스님의 ‘무소유’ 정신이 깃든 특별한 물건, 일명 ‘빠삐용 의자’로 불리우는 이 의자는 불일암에 거주하던 시절 교외에 나올 일이 있을 때 종종 극장을 찾아 조조영화를 봤을 만큼 영화를 즐겼던 법정스님이 당시 영화 ‘빠삐용’을 보고 영감을 얻어 만든 것. 참나무 장작개비로 손수 만든 이 의자는, 자연에서 얻은 소중한 산물이기도 하다. 이 의자가 지닌 상징성은 소설 ‘무소유’에서도 그 구절이 인용되어 있다. “의자 이름은 지어둔 게 있어. 빠삐용 의자야, 빠삐용이 절해고도에 갇힌 건 인생을 낭비한 죄였거든. 이 의자에 앉아 나도 인생을 낭비하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보는 거야.”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나는 지금 진정한 나로 살고 있는지.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보고, 참된 행복의 의미를 생각해보는 휴식과 치유의 의자라고 한다.
“살다가 다 가는 것이지, 영원히 사는 사람이 없잖아…” 하시며 2010년 3월 11일 79세의 나이로 입적하신 후 세상에 공개된 법정스님의 유언장은 많은 이들에게 충격과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마지막 떠나는 길에도 진정한 ‘무소유’의 삶을 실천했기 때문. 사십 년 전 그가 남긴 글 ‘미리 쓰는 유서’에는 ‘장례를 간소히 해라. 번잡하게 하지 말고 가사 한 장만 덮어서 보내달라.’는 ‘무소유’ 사상이 그대로 담겨있다. 이 유서의 내용은 79세의 나이로 입적할 때 한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지켜졌다. ‘고승열전’의 저자인 윤청광 작가는 “30대에 쓴 유언 그대로 일흔아홉에 돌아가셨는데 그걸 그대로 하신 분이 과연 세계에 몇 분이나 계실까?”라며 그의 행적에 깊은 존경을 표했다. 특유의 거친 목소리로 시작되는 법정스님의 유언은 다비식의 모습과 함께 법정스님의 육성이 그대로 전해지는 가슴 뭉클함이 남는 다큐였다.
법정스님이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 기억하는 때는 바로 스승인 효봉과 함께 보낸 한 철이라고 한다. 한번 참선에 들면 엉덩이가 짓무르도록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서 절구통 수자로 불린 효봉스님. 법정이 입산한 이듬해 효봉스님은 막 계를 받은 어린 사미승, 법정만을 대동한 채 모든 지도자의 자리를 거두고 지리산 쌍계사로 마지막 안거에 들어갔다. 그리고 법정스님은 바로 이 시절을 가장 행복하고 가슴 벅찬 시절로 기억했다. “중이 하나만 있으면 되지 왜 두 개가 필요한가”하며 법정으로 하여금 청빈의 도를 일깨워주며 ‘무소유’의 단초를 마련해 준 효봉스님.“네가 장사해서 번 돈도 아니고 신도들이 갖다 준 것인데, 도를 닦아서 부처되라고 신도들이 먹고 싶은 거 덜 먹고 입고 싶은 거 안 입고 갖다 준 것을 함부로 해서 되겠느냐”며 공양에 대한 감사를 일깨워준 계기를 마련해준 사람이기도 하다. 역시 큰 스승의 큰 가르침을 받은 듯 하다. 또한 그의 재능을 인정하고 귀하게 여긴승들 중 법정스님의 필력을 알아본 것은 운허스님이었다. 당시 평양의 인텔리로 독립운동을 하다가 출가한 운허스님은 법정스님의 필력을 가장 먼저 알아본 것. 우리나라 최초로 불경 번역사업을 시작한 동국역경원을 세우기도 한 운허스님은 법정스님에게 역경사업을 맡겼고 이후 수많은 불경들이 법정스님의 손을 거쳐 세상에 나왔다. 해인사 시절, 장경각을 구경하고 나오던 한 보살이 법정스님곁을 지나며 혼잣말로 ‘팔만대장경이 있다더니 웬 빨래판만 가득하더라’는 말을 들은 법정스님의 충격은 더욱 불교의 언어를 세상의 언어로 바꾸는 일에 매진하게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운허스님이 우리나라 최초의 불교사전 번역 작업을 하는 일에 법정스님이 참여하게 됐고, 법정스님은 어려운 불교 용어를 사전 없이도 글을 읽을 줄 아는 이라면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글로 전하여 절에 갇혀 있던 불교 사상을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지도록 불교의 대중화에 기여했다.
자연을 벗삼아 청빈의 도를 따라 무소유의 삶을 살았던 법정스님에게 마지막까지 가장 버리기 힘들었던 것은 아름다움을 추구하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법정스님에게 아름다움이란 가장 단순하고 절제된 삶, 즉 자연과 조화를 이룬 삶이었다. 그의 자연사랑은 대숲의 풍경이나 하늘을 바라볼 때, 맑은 바람 소리만 들어도 마음이 맑고 차분해지는 것으로 소유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를 사랑하는 사상 그 자체였다. 법정스님이 처음 불일암을 찾았을 때 텅 빈 절터에 홀로 피어 그를 맞아주던 벗꽃들의 순수한 아름다움은 그의 삶을 기쁨으로 채워주었던 소중한 것이었다. 법정스님과 마음을 나누고자, 삶에 힘이 되는 좋은 말 한 마디를 듣기 위해 깊은 산 속 암자를 찾아온 사람들에게 참나무 장작으로 직접 만든 의자에 앉히고는 “이 산 속까지 와서 무엇을 더 채우려는가. 자연을 마음껏 누리고 비워내고 가라.”는 말만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는 일화는 모든 이들의 마음 속에 자리하고 있는 ‘무소유’ 정신을 일깨워준 참된 행복의 순간이었다. 요즘 사람들이 자연과 격리되어 살며 점점 메마르고 각박해져 잃어버린 스스로를 자연 속에서 되찾고 가라는 의미에서였다. 세상 모든 만물을 사랑한 법정스님 자연 속 삶의 기쁨과 충만함으로 세상을 향기로 물들였던 법정스님!
출처 : daum 영화 줄거리
뱃속에는 밥이 적어야 하고
입안에는 말이 적어야 하며
마음속에는 일이 적어야 한다.
미리쓰는 유서 - 법정 스님
죽게 되면 말없이 죽을 것이지, 무슨 구구한 이유가 따를 것인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지레 죽는 사람이라면
의견서(유서)라도 첨부되어야겠지만
제 명대로 살 만치 살다가 가는 사람에겐
그 변명이 소용될 것 같지 않다.
그리고 말이란 늘 오해를 동반하게 마련이므로,
유서에도 오해를 불러 일으킬 소지가 있다.
그런데 죽음은 어느 때 나를 찾아올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 많은 교통사고와 가스 중독과 그리고 원한의 눈길이
전생의 갚음으로 나를 쏠는지 알 수 없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죽음 쪽에서 보면
한 걸음 한 걸음 죽어 오고 있다는 것임을 상기할 때
사는 일은 곧 죽는 일이며 생과 사는 결코 절연된 것이 아니다.
죽음이 언제 어디서 나를 부를지라도
"네" 하고 선뜻 털고 일어설 준비만은 되어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유서는 남기는 글이기보다
지금 살고 있는 '생의 백서(白書)'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육신으로서는 일회적일 수밖에 없는 죽음을 당해서도
실제로는 유서 같은 걸 남길 만한 처지가 못 되기 때문에
편집자의 청탁에 산책하는 기분으로 따라 나선 것이다.
누구를 부를까...?
유서에는 흔히 누구를 부르던데?
아무도 없다.
철저하게 혼자였으니까.
설사 지금껏 귀의해 섬겨온 부처님이라 할지라도 그는 결국 타인이다.
이 세상에 올 때도 혼자서 왔고 갈 때도 나 혼자서 갈 수밖에 없다.
내 그림자만을 이끌고 휘적휘적 삶의 지평을 걸어왔고 또 그렇게 걸어갈 테니
부를 만한 이웃이 있을 리 없다.
물론 오늘까지도 나는 멀고 가까운 이웃들과 서로 왕래를 하며 살고 있다.
또한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생명 자체는 어디까지나 개별적인 것이므로
인간은 저마다 혼자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보랏빛 노을 같은 감상이 아니라 인간의 당당하고 본질적인 실존이다.
고뇌를 뚫고 환희의 세계로 지향한 베토벤의 음성을 빌리지 않더라도,
나는 인간의 '선의지(善意志)'
이것 밖에는 인간의 우월성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온갖 모순과 갈등과 증오와 살육으로 뒤범벅이 된 이 어두운 인간의 촌락에
오늘도 해가 떠오른 것은 오로지 그 선의지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세상을 하직하기 전에 내가 할 일은
먼저 인간의 선의지를 저버린 일에 대한 참회다.
이웃의 선의지에 대해서 내가 어리석은 탓으로
저지른 허물을 참회하지 않고는 눈을 감을 수 없는 것이다.
때로는 큰 허물보다 작은 허물이 우리를 괴롭힐 때가 있다.
허물이란 너무 크면 그 무게에 짓눌려 '참괴(慙愧)'의 눈이 멀고
작을 때에만 기억이 남는 것인가?
어쩌면 그것은 지독한 위선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평생을 두고
그 한 가지 일로 해서 돌이킬 수 없는 후회와 자책을 느끼고 있다.
그것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문득문득 나를 부끄럽고 괴롭게 채찍질했다.
중학교 1학년 때,
같은 반 동무들과 어울려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서였다.
엿장수가 엿판을 내려 놓고 땀을 들이고 있었다.
그 엿장수는 교문 밖에서도 가끔 볼 수 있으리만큼 낯익은 사람인데
그는 팔 하나가 없고 말을 더듬는 불구자였다.
대여섯된 우리는 그 엿장수를 둘러싸고 엿가락을 고르는 체하면서
적지 않은 엿을 슬쩍슬쩍 빼돌렸다.
돈은 서너 가락치밖에 내지 않았다.
불구인 그는 그런 영문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 일이, 돌이킬 수 없는 이 일이,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가 만약 넉살 좋고 건장한 엿장수였더라면
나는 벌써 그런 일을 잊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장애자라는 점에서 지워지지 않은 채 자책은 더욱 생생하다.
내가 이 세상에 살면서 지은 허물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 중에는 용서받기 어려운 허물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까닭인지
그때 저지른 그 허물이 줄곧 그림자처럼 나를 쫓고 있다.
이 다음 세상에서는 다시는 더 이런 후회스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빌며 참회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살아 생전에 받았던 배신이나 모함도
그때 한 인간의 순박한 선의지를 저버린 과보라 생각하면 능히 견딜 만한 것이다.
"날카로운 면도날은 밟고 가기 어렵나니
현자가 이르기를 구원을 얻는 길 또한 이같이 어려우니라"
[우파니샤드]의 이 말씀을 충분히 이해할 것 같다.
내가 죽을 때는 가진 것이 없으므로
무엇을 누구에게 전한다는 번거로운 일도 없을 것이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은 우리들 사문의 소유 관념이다.
그래도 혹시 평생에 즐겨 읽던 책이 내 머리맡에 몇 권 남는다면,
아침 저녁으로 "신문이오" 하고 나를 찾아주는 그 꼬마에게 주고 싶다.
장례식이나 제사 같은 것은 아예 소용없는 일,
요즘은 중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한 술 더 떠 거창한 장례를 치르고 있는데
그토록 번거롭고 부질없는 검은 의식이 만약 내 이름으로 행해진다면
나를 위로하기는커녕 몹시 화나게 할 것이다.
평소의 식탁처럼 나는 간단 명료한 것을 따르고자 한다.
내게 무덤이라도 있게 된다면 그 차가운 빗돌 대신,
어느 여름날 아침에 좋아하게 된 양귀비꽃이나 모란을 심어 달라고 하겠지만
무덤도 없을 테니 그런 수고는 끼치지 않을 것이다.
생명의 기능이 나가버린 육신은 보기 흉하고 이웃에게 짐이 될 것이므로
조금도 지체할 것 없이 없애주었으면 고맙겠다.
그것은 내가 벗어버린 헌옷이니까...
물론 옮기기 편리하고 이웃에게 방해되지 않을 곳이라면
아무데서나 '다비(茶毘, 화장)'해도 무방하다.
사리 같은 걸 남겨 이웃을 귀찮게 하는 일을 나는 절대로 하고 싶지 않다.
육신을 버린 후에는 훨훨 날아서 가고 싶은 곳이 있다.
'어린 왕자'가 사는 별나라 같은 곳이다.
의자의 위치만 옮겨 놓으면
하루에도 해지는 광경을 몇 번이고 볼 수 있다는 아주 조그만 그런 별나라...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봐야 한다는 것을 안 왕자는
지금쯤 장미와 사이좋게 지내고 있을까?
그런 나라에는 귀찮은 입국사증 같은 것도 필요 없을 것이므로 한번 가보고 싶다.
그리고 내생에도 다시 한반도에 태어나고 싶다.
누가 뭐라 한대도 모국어에 대한 애착 때문에 나는 이 나라를 버릴 수 없다.
다시 출가 수행자가 되어 금생에 못 다한 일들을 하고 싶다.
종교를 떠나 인간다운 한 사람, 본보기가 되어 줄 큰 어른이 떠난 다는 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생명에 있어 태어남이 있으면 죽음도 있는 자연의 당연한 섭리라 하지만
너무 늦은 만남은 아니였는지...
그래도 이 영상의 배움을 통해 마음에 담을 수 있다는 것 감사한 일이다.
앞으로는 내가 실천하는 길 만이 남은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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