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의 의자

물질적인 풍요와 결과만을 쫓는 각박한 세상에서 수많은 이들에게 삶의 참된 의미와 여정의 중요성을 깨우쳐준 故법정스님. “선택한 가난은 가난이 아니다.”라는 청빈의 도를 실천하며, ‘무소유’의 진정한 가치를 널리 알려 온 故법정스님의 일대기와 가르침을 담은 "법정스님의 의자"는 성공과 실패만을 논하는 혼탁한 이 시대에 가련한 영혼을 일으켜 세우며 삶의 진실된 행복과 참된 가치를 일깨워 준 휴먼 다큐멘터리이다.

“법정스님의 의자”에 등장하는 의자는 법정스님의 ‘무소유’ 정신이 깃든 특별한 물건, 일명 ‘빠삐용 의자’로 불리우는 이 의자는 불일암에 거주하던 시절 교외에 나올 일이 있을 때 종종 극장을 찾아 조조영화를 봤을 만큼 영화를 즐겼던 법정스님이 당시 영화 ‘빠삐용’을 보고 영감을 얻어 만든 것. 참나무 장작개비로 손수 만든 이 의자는, 자연에서 얻은 소중한 산물이기도 하다. 이 의자가 지닌 상징성은 소설 ‘무소유’에서도 그 구절이 인용되어 있다. “의자 이름은 지어둔 게 있어. 빠삐용 의자야, 빠삐용이 절해고도에 갇힌 건 인생을 낭비한 죄였거든. 이 의자에 앉아 나도 인생을 낭비하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보는 거야.”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나는 지금 진정한 나로 살고 있는지.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보고, 참된 행복의 의미를 생각해보는 휴식과 치유의 의자라고 한다.

“살다가 다 가는 것이지, 영원히 사는 사람이 없잖아…” 하시며 2010년 3월 11일 79세의 나이로 입적하신 후 세상에 공개된 법정스님의 유언장은 많은 이들에게 충격과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마지막 떠나는 길에도 진정한 ‘무소유’의 삶을 실천했기 때문. 사십 년 전 그가 남긴 글 ‘미리 쓰는 유서’에는 ‘장례를 간소히 해라. 번잡하게 하지 말고 가사 한 장만 덮어서 보내달라.’는 ‘무소유’ 사상이 그대로 담겨있다. 이 유서의 내용은 79세의 나이로 입적할 때 한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지켜졌다. ‘고승열전’의 저자인 윤청광 작가는 “30대에 쓴 유언 그대로 일흔아홉에 돌아가셨는데 그걸 그대로 하신 분이 과연 세계에 몇 분이나 계실까?”라며 그의 행적에 깊은 존경을 표했다. 특유의 거친 목소리로 시작되는 법정스님의 유언은 다비식의 모습과 함께 법정스님의 육성이 그대로 전해지는 가슴 뭉클함이 남는 다큐였다.

법정스님이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 기억하는 때는 바로 스승인 효봉과 함께 보낸 한 철이라고 한다. 한번 참선에 들면 엉덩이가 짓무르도록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서 절구통 수자로 불린 효봉스님. 법정이 입산한 이듬해 효봉스님은 막 계를 받은 어린 사미승, 법정만을 대동한 채 모든 지도자의 자리를 거두고 지리산 쌍계사로 마지막 안거에 들어갔다. 그리고 법정스님은 바로 이 시절을 가장 행복하고 가슴 벅찬 시절로 기억했다. “중이 하나만 있으면 되지 왜 두 개가 필요한가”하며 법정으로 하여금 청빈의 도를 일깨워주며 ‘무소유’의 단초를 마련해 준 효봉스님.“네가 장사해서 번 돈도 아니고 신도들이 갖다 준 것인데, 도를 닦아서 부처되라고 신도들이 먹고 싶은 거 덜 먹고 입고 싶은 거 안 입고 갖다 준 것을 함부로 해서 되겠느냐”며 공양에 대한 감사를 일깨워준 계기를 마련해준 사람이기도 하다. 역시 큰 스승의 큰 가르침을 받은 듯 하다. 또한 그의 재능을 인정하고 귀하게 여긴승들 중 법정스님의 필력을 알아본 것은 운허스님이었다. 당시 평양의 인텔리로 독립운동을 하다가 출가한 운허스님은 법정스님의 필력을 가장 먼저 알아본 것. 우리나라 최초로 불경 번역사업을 시작한 동국역경원을 세우기도 한 운허스님은 법정스님에게 역경사업을 맡겼고 이후 수많은 불경들이 법정스님의 손을 거쳐 세상에 나왔다. 해인사 시절, 장경각을 구경하고 나오던 한 보살이 법정스님곁을 지나며 혼잣말로 ‘팔만대장경이 있다더니 웬 빨래판만 가득하더라’는 말을 들은 법정스님의 충격은 더욱 불교의 언어를 세상의 언어로 바꾸는 일에 매진하게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운허스님이 우리나라 최초의 불교사전 번역 작업을 하는 일에 법정스님이 참여하게 됐고, 법정스님은 어려운 불교 용어를 사전 없이도 글을 읽을 줄 아는 이라면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글로 전하여 절에 갇혀 있던 불교 사상을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지도록 불교의 대중화에 기여했다.

자연을 벗삼아 청빈의 도를 따라 무소유의 삶을 살았던 법정스님에게 마지막까지 가장 버리기 힘들었던 것은 아름다움을 추구하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법정스님에게 아름다움이란 가장 단순하고 절제된 삶, 즉 자연과 조화를 이룬 삶이었다. 그의 자연사랑은 대숲의 풍경이나 하늘을 바라볼 때, 맑은 바람 소리만 들어도 마음이 맑고 차분해지는 것으로 소유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를 사랑하는 사상 그 자체였다. 법정스님이 처음 불일암을 찾았을 때 텅 빈 절터에 홀로 피어 그를 맞아주던 벗꽃들의 순수한 아름다움은 그의 삶을 기쁨으로 채워주었던 소중한 것이었다. 법정스님과 마음을 나누고자, 삶에 힘이 되는 좋은 말 한 마디를 듣기 위해 깊은 산 속 암자를 찾아온 사람들에게 참나무 장작으로 직접 만든 의자에 앉히고는 “이 산 속까지 와서 무엇을 더 채우려는가. 자연을 마음껏 누리고 비워내고 가라.”는 말만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는 일화는 모든 이들의 마음 속에 자리하고 있는 ‘무소유’ 정신을 일깨워준 참된 행복의 순간이었다. 요즘 사람들이 자연과 격리되어 살며 점점 메마르고 각박해져 잃어버린 스스로를 자연 속에서 되찾고 가라는 의미에서였다. 세상 모든 만물을 사랑한 법정스님 자연 속 삶의 기쁨과 충만함으로 세상을 향기로 물들였던 법정스님!

출처 : daum 영화 줄거리


뱃속에는 밥이 적어야 하고

입안에는 말이 적어야 하며

마음속에는 일이 적어야 한다.


미리쓰는 유서 - 법정 스님

죽게 되면 말없이 죽을 것이지, 무슨 구구한 이유가 따를 것인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지레 죽는 사람이라면
의견서(유서)라도 첨부되어야겠지만
제 명대로 살 만치 살다가 가는 사람에겐
그 변명이 소용될 것 같지 않다.

그리고 말이란 늘 오해를 동반하게 마련이므로,
유서에도 오해를 불러 일으킬 소지가 있다.
그런데 죽음은 어느 때 나를 찾아올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 많은 교통사고와 가스 중독과 그리고 원한의 눈길이
전생의 갚음으로 나를 쏠는지 알 수 없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죽음 쪽에서 보면
한 걸음 한 걸음 죽어 오고 있다는 것임을 상기할 때
사는 일은 곧 죽는 일이며 생과 사는 결코 절연된 것이 아니다.

죽음이 언제 어디서 나를 부를지라도
"네" 하고 선뜻 털고 일어설 준비만은 되어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유서는 남기는 글이기보다
지금 살고 있는 '생의 백서(白書)'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육신으로서는 일회적일 수밖에 없는 죽음을 당해서도
실제로는 유서 같은 걸 남길 만한 처지가 못 되기 때문에
편집자의 청탁에 산책하는 기분으로 따라 나선 것이다.

누구를 부를까...?
유서에는 흔히 누구를 부르던데?
아무도 없다.
철저하게 혼자였으니까.

설사 지금껏 귀의해 섬겨온 부처님이라 할지라도 그는 결국 타인이다.
이 세상에 올 때도 혼자서 왔고 갈 때도 나 혼자서 갈 수밖에 없다.
내 그림자만을 이끌고 휘적휘적 삶의 지평을 걸어왔고 또 그렇게 걸어갈 테니
부를 만한 이웃이 있을 리 없다.
물론 오늘까지도 나는 멀고 가까운 이웃들과 서로 왕래를 하며 살고 있다.
또한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생명 자체는 어디까지나 개별적인 것이므로
인간은 저마다 혼자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보랏빛 노을 같은 감상이 아니라 인간의 당당하고 본질적인 실존이다.
고뇌를 뚫고 환희의 세계로 지향한 베토벤의 음성을 빌리지 않더라도,
나는 인간의 '선의지(善意志)'
이것 밖에는 인간의 우월성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온갖 모순과 갈등과 증오와 살육으로 뒤범벅이 된 이 어두운 인간의 촌락에
오늘도 해가 떠오른 것은 오로지 그 선의지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세상을 하직하기 전에 내가 할 일은
먼저 인간의 선의지를 저버린 일에 대한 참회다.
이웃의 선의지에 대해서 내가 어리석은 탓으로
저지른 허물을 참회하지 않고는 눈을 감을 수 없는 것이다.

때로는 큰 허물보다 작은 허물이 우리를 괴롭힐 때가 있다.
허물이란 너무 크면 그 무게에 짓눌려 '참괴(慙愧)'의 눈이 멀고
작을 때에만 기억이 남는 것인가?
어쩌면 그것은 지독한 위선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평생을 두고
그 한 가지 일로 해서 돌이킬 수 없는 후회와 자책을 느끼고 있다.
그것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문득문득 나를 부끄럽고 괴롭게 채찍질했다.

중학교 1학년 때,
같은 반 동무들과 어울려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서였다.
엿장수가 엿판을 내려 놓고 땀을 들이고 있었다.
그 엿장수는 교문 밖에서도 가끔 볼 수 있으리만큼 낯익은 사람인데
그는 팔 하나가 없고 말을 더듬는 불구자였다.
대여섯된 우리는 그 엿장수를 둘러싸고 엿가락을 고르는 체하면서
적지 않은 엿을 슬쩍슬쩍 빼돌렸다.
돈은 서너 가락치밖에 내지 않았다.
불구인 그는 그런 영문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 일이, 돌이킬 수 없는 이 일이,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가 만약 넉살 좋고 건장한 엿장수였더라면
나는 벌써 그런 일을 잊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장애자라는 점에서 지워지지 않은 채 자책은 더욱 생생하다.
내가 이 세상에 살면서 지은 허물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 중에는 용서받기 어려운 허물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까닭인지
그때 저지른 그 허물이 줄곧 그림자처럼 나를 쫓고 있다.
이 다음 세상에서는 다시는 더 이런 후회스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빌며 참회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살아 생전에 받았던 배신이나 모함도
그때 한 인간의 순박한 선의지를 저버린 과보라 생각하면 능히 견딜 만한 것이다.
"날카로운 면도날은 밟고 가기 어렵나니
현자가 이르기를 구원을 얻는 길 또한 이같이 어려우니라"
[우파니샤드]의 이 말씀을 충분히 이해할 것 같다.
내가 죽을 때는 가진 것이 없으므로
무엇을 누구에게 전한다는 번거로운 일도 없을 것이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은 우리들 사문의 소유 관념이다.
그래도 혹시 평생에 즐겨 읽던 책이 내 머리맡에 몇 권 남는다면,
아침 저녁으로 "신문이오" 하고 나를 찾아주는 그 꼬마에게 주고 싶다.

장례식이나 제사 같은 것은 아예 소용없는 일,
요즘은 중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한 술 더 떠 거창한 장례를 치르고 있는데
그토록 번거롭고 부질없는 검은 의식이 만약 내 이름으로 행해진다면
나를 위로하기는커녕 몹시 화나게 할 것이다.
평소의 식탁처럼 나는 간단 명료한 것을 따르고자 한다.
내게 무덤이라도 있게 된다면 그 차가운 빗돌 대신,
어느 여름날 아침에 좋아하게 된 양귀비꽃이나 모란을 심어 달라고 하겠지만
무덤도 없을 테니 그런 수고는 끼치지 않을 것이다.
생명의 기능이 나가버린 육신은 보기 흉하고 이웃에게 짐이 될 것이므로
조금도 지체할 것 없이 없애주었으면 고맙겠다.
그것은 내가 벗어버린 헌옷이니까...

물론 옮기기 편리하고 이웃에게 방해되지 않을 곳이라면
아무데서나 '다비(茶毘, 화장)'해도 무방하다.
사리 같은 걸 남겨 이웃을 귀찮게 하는 일을 나는 절대로 하고 싶지 않다.
육신을 버린 후에는 훨훨 날아서 가고 싶은 곳이 있다.
'어린 왕자'가 사는 별나라 같은 곳이다.
의자의 위치만 옮겨 놓으면
하루에도 해지는 광경을 몇 번이고 볼 수 있다는 아주 조그만 그런 별나라...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봐야 한다는 것을 안 왕자는
지금쯤 장미와 사이좋게 지내고 있을까?
그런 나라에는 귀찮은 입국사증 같은 것도 필요 없을 것이므로 한번 가보고 싶다.
그리고 내생에도 다시 한반도에 태어나고 싶다.
누가 뭐라 한대도 모국어에 대한 애착 때문에 나는 이 나라를 버릴 수 없다.
다시 출가 수행자가 되어 금생에 못 다한 일들을 하고 싶다.


종교를 떠나 인간다운 한 사람, 본보기가 되어 줄 큰 어른이 떠난 다는 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생명에 있어 태어남이 있으면 죽음도 있는 자연의 당연한 섭리라 하지만

너무 늦은 만남은 아니였는지...

그래도 이 영상의 배움을 통해 마음에 담을 수 있다는 것 감사한 일이다.

앞으로는 내가 실천하는 길 만이 남은 듯 하다.

비기너스(원제: Beginners)

너무나 평범한 영화.
하지만 그 안에 모든게 들어 있는 영화.

아내가 죽자 난 게이였다고 75세에 게이선언, 커밍아웃한 아빠(할-크리스토퍼 플러머)
페암 4기이지만 파티를 즐겨하고 클럽 하우스음악을 좋아하며 연하의 상대와 연애하는 것, 즐기는 것에 대한 두려움 없이 "진짜인생"을 살겠다며 행복해 하는 '할'
4번의 실연을 경험했지만 38살에 찾아 온 남다른 사랑에 대해 불안해 하며 사랑이 잘못 될꺼 같다는 마음에 먼저 떠나려고 하는 사랑을 두려워 하는 아들(올리버-이완 맥그리거)
슬픔을 아픔을 자신에게서 드러내기 보다는 그림안에 풀고 풀어 가려는 특별함이 없는 '올리버'
올리버, 그의 기억에 있어 부모는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형식적인 부부관계로 뜨거운 마음의 엄마는 늘 외롭고 상대적인 아빠의 추억은 별다른 기억 없이 성장한 아들, 그런 부모를 머리와 가슴의 거리를 좁히려 하지만 사랑을 시작할 수 있을지 두려워 했었던 아들.
올리버의 마음을 유일하게 알아주고 항상 그의 곁에서 지키고 있는 150개의 단어를 알아들으며 대화를 나누는 강아지 아더. 아더의 눈빛연기는 연기대상 감 ^^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을 하려는 사람이라면 꼭 봐야할 영화"라는, 딱 한 구절만 듣고 봐야 겠다고 점 찍어 두고 있었는데...
사랑영화라는 이야기를 듣고 나갈까 말까 하다 기분전환으로 다녀 온 저녁 외출!! 잘 다녀온 듯 하다. 올 해는 내게 너무나 짧은 시간에 많은 변화를 받아 들여야 하는 상황들이 낯설기도 하며 언제부터인가 다음에 여유있을 때를 남발하고 있는 부끄러운 내 일상을 그대로 보여 준 듯 싶다.
어쩜 이리도 잔잔히 재미없을 수도 있을 일상을 표현하면서도 많은 걸 보여주고 이야기 해 주었던 영화. "비기너스(원제: Beginners)"

특히 얼마전 아빠의 입원은 우리 가족에게 커다른 놀람으로.. 나에게는 아버지의 삶과 죽음을 생각해봐야 한다고, 늘 곁에 있는 엄마, 아내, 여자라는 역할 보며 내가 살아온 인생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인생에 손을 얹는 계기가 되는 저녁이 됐다.
전라도 엄마의 뜨거운 열정은 역시 아빠의 병환 속 에서 제일가는 공신이였으며, 늘 담담한 모습으로 좋다 싫다 표현치 않는 경상도 아빠의 무뚝뚝한 마음은 나를 힘들게 했다.
그렇다고 우리 아빠가 영화 속 주인공처럼 게이는 아니면서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심많은 엄마에게 사랑표현 즉 애정표현은 왜 그리 아끼시는지 인색하신지.. 미성년 같은 내 머리로 마음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나는 영화 속 아더처럼 우리집 강생이와 한 침대에서 동침을 하며 이성간의 사랑을 챙기기 보다는 아낌없이 받는 사랑에 더욱 익숙해 져버렸다. 내 마음대로 보고픈 대로 하고 픈대로만 하는 30세 미만 미성년의 모습을 다시한번 발견 하는 듯. 사회 속 인간 관계에서 또한 가식적인 것에 적응이 어려워 조금이라도 어색하다 싶으면 먼저 도망가 버리기에 손해 보더라도 마주하지 아니 하며 포기해 버리기도 하는 바보같은 맹꽁이.


사랑에 대한 대상이 사물이 건 사랑이 건 그 어떤 것이 건 뜨거운 열정으로 죽는 순간까지 사랑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고 그것이 인생을 어떻게 바꾸어 놓을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잔잔한 영화!!!
아픔 없이 노력 없이 절대로 그냥 내게 오지 않는 것들, 더 늦기 전에 '진짜 인생'을 두려워 말고 멀리 보고 시작해 보라고 '용기'를 주는 영화.
그 동안 미성년처럼 지내온 내게 잔잔한 호수의 모습 보다는 익숙한 것들과 결별도 해보며 힘찬 파도처럼 힘찬 물살을 일렁이는 물이 되어 봐야 한다고 나 만의 진짜 인생, 진짜 사랑을 만들기 위해서 시작해 보라고 한다.


지난 가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한참을 서서 보았던 묵화,
워낭소리 한 장면도 스치며 맘이 짠했던 작품, 김호석 '소'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요즘의 내 모습을 보는 듯 한 영화가 되었다.
사랑으로 인하여 균형을 유지할 수 없을 때, 내 삶에 끝없는 변화를 요구하는 나를 감당 못할 때, 주변에 누군가에게 나를 설득하지 못하고 있을 때, 헛된 것을 기다리면서 살고 있는 내 모습은 아니였는지...

헌데 이 영화에서 그 모든 답을 주는 듯 하다.
자연의 법칙을 이야기하며 본성의 힘은 중력의 법칙처럼 실재하는 것이며...
때로는 사랑으로 인하여 균형이 깨지는 것도 균형있는 삶을 살아가는 과정이라고.
편안하고 익숙한 모든 것으로 부터 떠날 수 있는 용기가 생겼을 때야 알 수 있다고...
파괴는 선물이며, 파괴가 있어야 변화가 있다고...
끝없는 변화에 대비하는 것, 여자로서 누구의 보호를 받아야 함보다는,
익숙함을 서로 지키며 같이 있는 것보다 더 좋은 인생을 즐길 자격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머무르는 일보다 더 힘이 드는게 떠나는 일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진리를 찾는 것, 나를 찾는 것이 그리도 힘이 드는 일인지도...

진리를 찾아 여행을 떠날 것이라면...
감정의 응어리이건, 외면의, 내면의 것이든, 길 위에서 마주하는 모든 것을 깨달음의 과정으로 여길 줄 알아야 하며, 마주하는 모든 이들에게서 배우고자 하는 마음의 자세를 가질 수 있을 때 그리고 무엇보다 인정하기 힘든 자신의 모습을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을 때에 그 진리는 나에게 모습을 드러 내는 것이라고 한다.

돌체 파 니엔테(DOLCE FAR NIENTE) 달콤한 게으름.
편하게 살려고 발버둥 치는 내모습이 아니라는 것, 보다 힘들게 살지 않으려는 자세
그냥 즐기는 것이 아닌 기쁜 마음으로 즐길 줄 아는 자가 되어 보는 것!!!


나에게 많은 깨달음을 준 영화이다. 즐겁게 보고 행복함 얻는 영화
2% 부족한 아쉬움을 책을 통해 만나보자!! 좋은 글귀, 좋은 생각을 다시 한번 얻기 위해...

2011 피카소와 모던 아트







덕수궁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피카소와 모던 아트 전은 제목과는 달리 피카소의 작품은 아주 적었다.
어짜피 Paris에서 피카소미술관도 다녀 왔던터라 피카소보다는 유럽 모더니즘 대표작가에 욕심이 났다.
많은 작품구성에 많은 인파로 사람에 치여 급 지치기는 했는데 잘 다녀온 듯 싶다. 헌데 도록 이외에는 작품에 딸린 소품을 구매하는데 한계가 있어 좀 아쉬움이 많이 남는 전시이기도 하다...
사진촬영도 금지 되었던 터라 오랜만에 초등학생처럼 메모하며 구경했던 전시 ^^

시각적인 감성없이는 빛도 없으며 또한 움직임도 없다. 자연 속에서의 빛은, 색상들의 움직임을 만들어 낸다. - 로베르 들로네
=> 추가설명(Robert Delaunay)
시각적인 것 뿐만 아닌 청각적인 소리도 음악도 이와 같은 듯 싶다.



Lot 132, "Air, fer and eau, etude," by Robert Delaunay, gouache over pencil on paper laid down on panel, 19 5/8 by 33 5/8 inches, 1937

그림출처 : thecityreview

호안 미로의 변신

샤갈의 잠자는 여인과 꽃 / 야곱의 꿈


끌로드 모네의 장미정원이 있는 집

에리히 헤켈의 나무 옆에 서 있는 여인


오토 뮐러 물가의 벗은 여인들 / 들판의 세 소녀

오스카 코코슈가의 누워있는 누드 / 과일과 새가 있는 정물

에밀놀데의 강가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의 컵을 든 소녀 / 실내의 두 나부

이리히 헤켈의 누워있는 인물


아우구스트마케의 테게른 호수의 요트 놀이

프란티세크 쿠프카의 상승

로베르 들로네의 미의 세 여신

나탈리아 곤차로바의 공작새

요하네스 이텐의 빛의 서클


폴시냑의 베니스의 핑크 빛 구름


프란츠 마르크 의 잠자는 양기치 소녀


폴 세잔의 노르망디 농장

등 많은 작품이 눈에 들어오는 것들을 제목과 작가만이라도 적어 두웠다. 하나씩 찾아 보고 살 좀 붙여 봐야겠다. ^^ (맘에 드는 작품을 볼 때면 나도 언젠가는 마음에 드는 작품을 갖을 수 있겠지? 꼭 마주하고 사는 날이 오겠지 하며 그날을 꿈꾸어 본다.)

요즘은 정말 주말에 전시회 가는 건 좀 미친짓 같기도 하다. 이제는 평일 관람도 가능해 졌으니 시도해 봐야 겠다. ^^ (생각만으로 기쁘다 ㅋㅋ)
전시관람이 여유롭게 이루어 져야 하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 물밀려 가듯 어수선한 상황이 발생된다.
그래도 남녀커플이 전시회를 둘러보며 작품을 함께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봤을 때는 나의 바램인지 얼마든지 나의 아량이 넓어지지만 서로 아무 말도 없이 보는 커플을 보고 있노라면 왜 같이 왔을가 싶기도 하고... 이 또한 나의 오지랖, 나의 편견 일런지도... 사람마다 다른 것을...
이 또한 내가 보고픈대로 보고, 익숙한 것들에 대한 습관이겠지, 익숙한 것에는 그만 열중하고 좀 더 다양하게 접해 보는 것이 우선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눈을 뜨고 귀를 열고 편식 없도록...

창조가 있기 전에 먼저 파괴가 있어야 한다. 고상한 취향이란 얼마나 불괘한 것인가!
그 취향이란 창의력의 적이다. - 피카소 파블로

참고 : 독일의 표현주의 (클릭)

출처 : 네이버, 피카소와 모던 아트 홈페이지

우리는 국악을 얼마나 알고 있나

국립국악원에서 발간하는 '국악누리' 이번 호에서 눈에 확 뜨인 글이 있었다. 이윤주 님(국립국악원 학예연구사)이 쓴 '국악에 다가서기 첫걸음- 찾아보세요'라는 제목의 원고 가운데 일부를 인용한다.

다음은 서울대학교 국악과 출신인 문성모 목사가 독일의 한인교회에서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국악에 관한 강연을 할 때 '한국적인 자각을 위한 질문'이라는 제목으로 서양음악과 국악을 비교하는 문제에 사용한 질문입니다.

1. 바하를 아십니까? 우륵을 아십니까?

2. 운명 교향곡을 아십니까? 수제천을 아십니까?

3. 소나타 형식을 아십니까? 도드리 형식을 아십니까?

4. 바이올린은 몇 줄입니까? 거문고는 몇 줄입니까?

5. 오선보를 아십니까? 정간보를 아십니까?

6. 평균율은 무엇입니까? 삼분손익법이 무엇입니까?

7. 도.레.미.파.솔이 무엇입니까? 황.태.중.임.남이 무엇입니까?

8. 장조와 단조는 무엇입니까? 평조와 계면조는 무엇입니까?

9. 레시타티브는 무엇입니까? 아니리는 무엇입니까?

10. 고전파. 낭만파는 무엇입니까? 아악. 당악. 향악은 무엇입니까?

11. 현악4중주의 악기편성은? 삼현육각의 악기편성은?

12. 겨울나그네를 아십니까? 치화평을 아십니까?

13. 전람회의 그림을 아십니까? 영산회상을 아십니까?

14. 가곡 보리수의 가사를 아십니까? 가곡 초수대엽의 가사를 아십니까?

15. 카루소를 아십니까? 임방울을 아십니까?

16. 로렐라이 언덕을 불러보십시오. 진도 아리랑을 불러보십시오.

17. 당신은 독일 사람입니까? 당신은 한국 사람입니까?

문 목사는 5분의 시간을 주고 국악에 대한 문제 중 3개 이상 정답을 맞히는 사람에게는 선물을 주겠다고 했고, 음악애호가라고 자처하는 많은 사람들이 서양 음악에 관한 질문에는 거의 정답을 맞혔다고 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독일 사람입니까? 당신은 한국 사람입니까?" 문제를 제외하고는 국악에 대해서는 정답을 아는 이가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셨는지? 나는 국악을 세 문제 이상 맞히긴 했으나, 명색이 문화부 음악 담당 기자로서 결코 자랑할 수준은 아니다. 질문을 읽어 내려가며 새삼 깨달았다. 서양음악에 비해 국악에 대한 지식이 얼마나 부족한지. 글쓴이는 단지 '우리 것이 소중하다'는 식으로 애국심을 자극하는 접근은 그 자체로 부담될 수 있으니, '음악도 음식처럼, 편식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여러 장르의 것을 섭취한다고 생각'하는 게 좋을 것이라고 했다.

글을 읽다 보니 생각나는 일이 있었다. 영국 연수 시절 알고 지냈던 친구(프랑스인이다)가 지난해 여름 한국에 놀러 왔다. 영국에 있을 때, 우연히 들었던 가야금 소리가 좋았다고 해서 내가 갖고 있던 황병기 음반을 선물했더니 굉장히 기뻐했던 친구다. 청계천에 같이 놀러 갔는데, 한참 걷다 보니 어디선가 풍악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엔 '근처에 무슨 문화행사가 있나?' 하고 고개를 갸웃했는데, 정조대왕의 의전행렬을 그린 '정조반차도'가 벽화로 그려진 구간에 울려 퍼지는 음악 소리였다.

정조반차도는 사도세자의 회갑을 기념하기 위해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화성과 현릉원을 다녀오는 의전 행렬을 그린 것이다. '이 음악이 뭐냐'고 묻는 친구에게 '아마도 궁중의 행사음악인 것 같다'고 대답해 줬다. 친구는 크게 흥미를 보이며 이 음악을 휴대전화로 녹음해 갔다. 주변 소음 때문에 들을 만하게 녹음되지는 못했지만.

이 친구가 영국에 돌아간 후, 나는 음반을 하나 사서 보내줬다. 영국인 음악학자 존 레비(1910~1976)가 1964년 한국에서 녹음했던 한국 전통음악 컬렉션 가운데 한 장, 'Court Music(궁중음악)'이라는 제목이 붙은 음반이었다. 영문 해설이 잘 돼 있는 것 같아 골랐던 음반이다. 지난해 복원 발매된 명반으로 알려져 있는데 정작 나는 이 음반을 들어보지 않았다. 친구는 요즘 열심히 이 음반을 듣고 있다고 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가 청계천에서 들었던 음악은 취타-대취타-함녕지곡이었다. 취타와 대취타는 관악기와 타악기로 연주되는 행진음악이며 '편안함이 두루 미친다'는 뜻의 관악합주곡 '함녕지곡'은 관악영산회상 8곡 가운데 일부를 연주할 때 불리는 이름이다. 궁중에서 많이 사용된 음악이니, 내가 '궁중음악' 음반을 사 보낸 건 헛짚은 건 아니다. 하지만 존 레비 컬렉션에는 '관악 영산회상'이 따로 나와있으니, 청계천에서 들었던 그 음악을 다시 들려주려면 '관악 영산회상' 음반을 샀어야 했다.

이윤주 님의 글을 읽으면서 존 레비 컬렉션, 외국인 친구한테만 사 줄 것이 아니라, 나야말로 사서 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고로, 궁중음악은 포함돼 있지 않지만, 이윤주 님이 글에서 추천한 초심자용 국악 음반을 소개한다. 본격적 국악이라기보다는 크로스오버에 가까운 음반들이 많다. 이 중에는 내가 들어본 음반들이 꽤 있으니 그나마 다행스럽다고 해야 할까. 문화부 기자, 하면 할수록 공부할 게 많아지는 느낌이다.

슬기둥 「캐롤」, 공명 「통해야」, 숙명가야금연주단 「베스트 셀렉션 2006」, 그림 「아침풍경」김용우 「소리꾼 김용우 10년지기」, 정수년 「공(空)」, 양방언 「Pan-o-rama」


최종편집 : 2011-01-13 17:01 글쓴이 SBS 김수현기자

출처 : SBSnews

낮과 밤 - 홍상수

홍상수 이젠 찌질남을 넘어 찌질녀까지 손을 대는 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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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비지터에 나온 앨범 Fela 'Ransome' Kuti - Open & Close (1971)
나이지리아의 음악가. 미국의 블루스·재즈·펑크를 전통적인 요루바 음악과 융합시켜 아프로비트라는 아프리카풍의 현대음악을 만들어냈다. 급진적 음악가이자 정치가로서 1960년대 아프리카에서 가장 유명한 스타 중 하나이다.

본명 펠라 란소메 쿠티
별칭 흑인 대통령
국적 나이지리아
활동분야 음악
출생지 나이지리아 아베오쿠타
주요작품 《업사이드 다운》 《멍키 바나나》
주요업적 아프로비트 음악 창시

미국의 블루스·재즈·펑크를 전통적인 요루바 음악과 융합시켜 아프로비트(afro-beat)라는 아프리카풍의 현대음악을 만들어냈다. 본명은 펠라 란소메 쿠티였으나 이 이름이 식민주의적이라고 거부하여 펠라 안티쿨라포 쿠티로 개명하였는데, 이는 ‘부적으로 죽음을 통제하는 사냥꾼’이라는 뜻이다. 또 뒤에는 ‘흑인 대통령(Black President)’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다.

1938년 나이지리아 라고스 북쪽의 아베오쿠타에서 목사이자 피아니스트인 아버지와 여성운동가이자 정치운동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중산층 가정에서 성장한 펠라는 어린 시절 피아노와 타악기 주법을 배웠으며, 1958년 영국 런던으로 의학을 공부하러 떠났다가 트리니티칼리지에서 클래식 음악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유럽 고전음악을 공부하는 데 취미를 못 느껴 학교를 그만두고 ‘쿨라 로비토스 Koola Lobitos’라는 밴드를 조직한 뒤 연주활동을 하였다. 이때 펠라는 자신의 음악을 아프로비트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1960년대 말 펠라는 ‘크림(Cream)’과 ‘블라인드 페이스(Blind Faith)’라는 전설적 록밴드의 드러머인 진저 베이커(Ginger Baker)와 만나면서 인간적·음악적으로 교류하였고, 또 한편으로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산드라 이시도어(Sandra Isidore)와 만났다. 흑인 급진단체 블랙팬더당과 관련을 맺고 있던 이시도어는 펠라에게 맬컴엑스(Malcolm X)와 엘드리지 클리버(Eldrige Cleaver) 등의 저작을 소개하는 등 흑인 내셔널리즘과 아프리카중심주의를 접하게 해주었다. 밴드의 이름을 ‘나이지리아 70(Nigeria 70)’으로 바꾸고 자신의 성(姓)을 ‘안티쿨라포’로 개명한 것도 이시도어와 만난 뒤의 일이었다.

1970년 나이지리아에 정착한 펠라는 ‘칼라쿠타 공화국(Kalakuta Republic)’이라는 공동체를 만들고 그와 동시에 밴드의 이름을 다시 ‘아프리카 70(Afrika 70)’으로 바꾸었다. 그리고는 소울과 펑크에 요루바 음악의 동태적 리듬을 결합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펠라는 주로 영어로 노래불렀지만 억양이 독특하고 요루바어가 섞여 있어서 미국의 흑인음악과는 조금 다른 느낌을 주었다. 그는 뚜렷한 멜로디를 노래하기보다는 주술을 외우듯 툭툭 내뱉는 스타일로 노래하였다.

1960년대 후반부터 펠라는 자신의 음악을 나이지리아 군사정권의 억압에 항의하는 수단으로 이용했으며, 이후 아프리카에서 가장 유명한 스타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의 노래는 실업자와 하층민, 피억압 민중의 감정을 교묘하게 흔들어 그들의 심금을 울렸다. 그와 더불어 군사정부의 탄압도 시작되었다. 1973년부터 정부의 감시를 받던 펠라는 1974년 대마초 소지 혐의로 50명의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1977년에는 1,000명의 군인들이 펠라의 집을 습격하여 불을 지르고, 동료와 가족들을 폭행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펠라는 사건 직후 잠시 가나로 망명했다가 돌아와 1979년 국민운동(Movement of the People)이라는 정당을 결성하여 나이지리아 대통령 선거에 후보로 나섰지만 실패하였다. 그뒤 1980년 민간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음악 활동에도 자유가 보장되었다. 이 시기에 밴드는 ‘이집트 80’으로 개명하였는데, 이때 발표된 《흑인 대통령 Black President》(1981)과 《Original Sufferhead》(1984) 등은 미국을 비롯한 서구 시장에도 소개되면서 펠라의 최고작이 되었다. 이 작품들에서 펠라의 음악은 아프리카 음악도, 아메리카 음악도 아닌 독창적인 스타일을 확립하였다.

그러나 1983년 나이지리아에서 다시 군부 쿠데타가 발생하면서, 1984년 펠라는 라고스 공항에서 외화 도피 사건으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가 국제사면위원회의 노력으로 18개월만에 석방되었다. 석방 뒤에도 펠라는 음악활동을 계속해 나갔으나, 이러한 정치적 탄압과 더불어 후천성면역결핍증(AIDS)과 싸워야 했다. 그 와중에서도 그는 ‘결코, 결코 멈추지 말고 싸워라(never, never stop fighting)’라는 감옥에서의 선언과 ‘음악은 미래의 무기(Music is the Weapon of the Future)’라는 평소의 신조를 실천해 나갔다. 펠라는 1997년 군부에 의해 마리화나 소지 및 복용으로 연행되어 일주일 정도 구속된 뒤 석방되자마자 죽었다.

그는 공적 생활에서는 존중받는 급진적 음악인이자 정치인이었지만, 사생활에서는 가부장주의적이고 성차별주의적인 가장이었다. 28명의 부인과 결혼하였고 나중에는 그들 모두와 이혼하였으며, 아들인 페미 쿠티에게 밴드를 상속하기도 하였다.

주요작품에 고속도로를 건설하기 위해 토지를 수용하려는 정부를 비꼬는 《천천히 다녀라 Go Slow》(1975), 군인과 정치인들을 풍자한 《좀비 Zombie》(1977), 정부의 난폭함과 관료의 무능을 꼬집은 《업사이드 다운 Upside Down》 등을 비롯하여 《멍키 바나나 Monkey Banana》 《국적 없는 짐승들 Beasts of No Nation》 《Everything Scatter》 등의 사회적 저항정신을 엿볼 수 있는 노래가 있다.

출처 : 두산 엔사이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