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라 쿠티 [Fela Antikulapo Kut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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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비지터에 나온 앨범 Fela 'Ransome' Kuti - Open & Close (1971)
나이지리아의 음악가. 미국의 블루스·재즈·펑크를 전통적인 요루바 음악과 융합시켜 아프로비트라는 아프리카풍의 현대음악을 만들어냈다. 급진적 음악가이자 정치가로서 1960년대 아프리카에서 가장 유명한 스타 중 하나이다.

본명 펠라 란소메 쿠티
별칭 흑인 대통령
국적 나이지리아
활동분야 음악
출생지 나이지리아 아베오쿠타
주요작품 《업사이드 다운》 《멍키 바나나》
주요업적 아프로비트 음악 창시

미국의 블루스·재즈·펑크를 전통적인 요루바 음악과 융합시켜 아프로비트(afro-beat)라는 아프리카풍의 현대음악을 만들어냈다. 본명은 펠라 란소메 쿠티였으나 이 이름이 식민주의적이라고 거부하여 펠라 안티쿨라포 쿠티로 개명하였는데, 이는 ‘부적으로 죽음을 통제하는 사냥꾼’이라는 뜻이다. 또 뒤에는 ‘흑인 대통령(Black President)’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다.

1938년 나이지리아 라고스 북쪽의 아베오쿠타에서 목사이자 피아니스트인 아버지와 여성운동가이자 정치운동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중산층 가정에서 성장한 펠라는 어린 시절 피아노와 타악기 주법을 배웠으며, 1958년 영국 런던으로 의학을 공부하러 떠났다가 트리니티칼리지에서 클래식 음악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유럽 고전음악을 공부하는 데 취미를 못 느껴 학교를 그만두고 ‘쿨라 로비토스 Koola Lobitos’라는 밴드를 조직한 뒤 연주활동을 하였다. 이때 펠라는 자신의 음악을 아프로비트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1960년대 말 펠라는 ‘크림(Cream)’과 ‘블라인드 페이스(Blind Faith)’라는 전설적 록밴드의 드러머인 진저 베이커(Ginger Baker)와 만나면서 인간적·음악적으로 교류하였고, 또 한편으로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산드라 이시도어(Sandra Isidore)와 만났다. 흑인 급진단체 블랙팬더당과 관련을 맺고 있던 이시도어는 펠라에게 맬컴엑스(Malcolm X)와 엘드리지 클리버(Eldrige Cleaver) 등의 저작을 소개하는 등 흑인 내셔널리즘과 아프리카중심주의를 접하게 해주었다. 밴드의 이름을 ‘나이지리아 70(Nigeria 70)’으로 바꾸고 자신의 성(姓)을 ‘안티쿨라포’로 개명한 것도 이시도어와 만난 뒤의 일이었다.

1970년 나이지리아에 정착한 펠라는 ‘칼라쿠타 공화국(Kalakuta Republic)’이라는 공동체를 만들고 그와 동시에 밴드의 이름을 다시 ‘아프리카 70(Afrika 70)’으로 바꾸었다. 그리고는 소울과 펑크에 요루바 음악의 동태적 리듬을 결합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펠라는 주로 영어로 노래불렀지만 억양이 독특하고 요루바어가 섞여 있어서 미국의 흑인음악과는 조금 다른 느낌을 주었다. 그는 뚜렷한 멜로디를 노래하기보다는 주술을 외우듯 툭툭 내뱉는 스타일로 노래하였다.

1960년대 후반부터 펠라는 자신의 음악을 나이지리아 군사정권의 억압에 항의하는 수단으로 이용했으며, 이후 아프리카에서 가장 유명한 스타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의 노래는 실업자와 하층민, 피억압 민중의 감정을 교묘하게 흔들어 그들의 심금을 울렸다. 그와 더불어 군사정부의 탄압도 시작되었다. 1973년부터 정부의 감시를 받던 펠라는 1974년 대마초 소지 혐의로 50명의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1977년에는 1,000명의 군인들이 펠라의 집을 습격하여 불을 지르고, 동료와 가족들을 폭행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펠라는 사건 직후 잠시 가나로 망명했다가 돌아와 1979년 국민운동(Movement of the People)이라는 정당을 결성하여 나이지리아 대통령 선거에 후보로 나섰지만 실패하였다. 그뒤 1980년 민간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음악 활동에도 자유가 보장되었다. 이 시기에 밴드는 ‘이집트 80’으로 개명하였는데, 이때 발표된 《흑인 대통령 Black President》(1981)과 《Original Sufferhead》(1984) 등은 미국을 비롯한 서구 시장에도 소개되면서 펠라의 최고작이 되었다. 이 작품들에서 펠라의 음악은 아프리카 음악도, 아메리카 음악도 아닌 독창적인 스타일을 확립하였다.

그러나 1983년 나이지리아에서 다시 군부 쿠데타가 발생하면서, 1984년 펠라는 라고스 공항에서 외화 도피 사건으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가 국제사면위원회의 노력으로 18개월만에 석방되었다. 석방 뒤에도 펠라는 음악활동을 계속해 나갔으나, 이러한 정치적 탄압과 더불어 후천성면역결핍증(AIDS)과 싸워야 했다. 그 와중에서도 그는 ‘결코, 결코 멈추지 말고 싸워라(never, never stop fighting)’라는 감옥에서의 선언과 ‘음악은 미래의 무기(Music is the Weapon of the Future)’라는 평소의 신조를 실천해 나갔다. 펠라는 1997년 군부에 의해 마리화나 소지 및 복용으로 연행되어 일주일 정도 구속된 뒤 석방되자마자 죽었다.

그는 공적 생활에서는 존중받는 급진적 음악인이자 정치인이었지만, 사생활에서는 가부장주의적이고 성차별주의적인 가장이었다. 28명의 부인과 결혼하였고 나중에는 그들 모두와 이혼하였으며, 아들인 페미 쿠티에게 밴드를 상속하기도 하였다.

주요작품에 고속도로를 건설하기 위해 토지를 수용하려는 정부를 비꼬는 《천천히 다녀라 Go Slow》(1975), 군인과 정치인들을 풍자한 《좀비 Zombie》(1977), 정부의 난폭함과 관료의 무능을 꼬집은 《업사이드 다운 Upside Down》 등을 비롯하여 《멍키 바나나 Monkey Banana》 《국적 없는 짐승들 Beasts of No Nation》 《Everything Scatter》 등의 사회적 저항정신을 엿볼 수 있는 노래가 있다.

출처 : 두산 엔사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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